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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Sep 06. 2019

욕실에서 한국어 타임

해외에서 크는 우리 아이, 한국어 어떻게 가르칠까?

아이가 만 3살이 되어가던 어느 날.

한국에 다녀온 이후로 부쩍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다.


문장을 말하진 못하지만, 여기, 저기, 누구 거야, 내 거야 등등 몇 가지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보다 되려 내가 겁을 먹고 ‘가르칠 수 있을까. 배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한국에 있는 며칠 사이에 한국어가 느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정말 흡수가 빠르고 호기심과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느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되도록이면 둘만의 시간엔 한국어로 대화하려고 노력하는데, 시부모님부터 남편까지 일본어가 생활어인 우리 집에서 아이와 내가 1:1로 한국어를 쓸 수 있는 건 욕조에 있는 시간이 유일하다.


오늘도 단둘이 한국어 타임을 즐기며 목욕을 하고 있는데, 예정보다 일찍 집에 들어온 아빠가 등장!


아이와 둘이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하니 입이 삐쭉, 나온다.


아직은 한국어의 어휘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니 ‘두 언어를 섞어 쓰면 사고에 혼란이’ 오고 ‘비논리적인 아이가 된다’면서, ‘하려면 다 한국어로 하던지’한다. 그리고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시 돌아와서 이왕이면 한국어는 ‘모국어가 자리 잡은 10세 이후에’ 했으면 한다고 한다.


(말이야 방구야. 일본은 모국이고 한국은 모국 아니여?)


신기하다. 이런 식의 논리를 들으면.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되는 것 같은 놀라운 언어의 마법. 마치 극우 인사들의 궤변을 들으며 어떻게 저런 논리와 발상이 가능할까?라고 느끼는 그 감정과 비슷하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이가 한국어를 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깔려있는 걸까?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했다.


어떻게 이 불편한 마음을 상대가 알아줄까. 내 말이 그저 화살처럼 꽂히면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 그럼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지? 맞아, 그전에 어떤 서론과 전제를 두어야 오해가 덜할까… 아니, 그런 장치들이 오히려 거북하게 느껴져 귀와 마음을 닫아버릴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보따리 이고 잠자리에 드니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 편지를 쓰자.


나는 말이 부족하니 편지를 쓰자. 그냥 쓰면 쓰다 지우 고를 반복할 테니 넓은 종이에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쏟아부어 보자.



남편에게.


나는 우리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전제로 조율해 나가기를 바래. 그런데 내 생각을 전달하자니 말이 부족하다. 그러니 편지를 쓴다.


(앞으로도 전달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표현이 부족할 땐, 편지를 쓸게. 너무 부담스러워 말고 나의 고충을 같이 이해해주길!)


우리 아이와 한국(어)에 대하여. 나는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어. 물론, 교육자가 아니고 전문가가 아니기에 완벽할 순 없지만 엄마로서 책임을 가지고 세운 기준이야.
 

하나. 우리 아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야.

난 우리의 아이가 양국의 언어를 같이 씀으로 인해서 혼란이 오고, 사고가 둔해지고, 판단력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지금도 화자에 따라서 충분히 양국의 언어를 취사선택하고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거든.

 
둘. 내가 엄마인 이상, 우리 아이에게 한국 문화와 언어는 필수여야 해.

 
셋.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워야 해.

억지스럽거나 혹은 제한적으로 가 아니라, 가장 편안하게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접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하조직도 아니고 조선 시대 독립운동가도 아니야. 한국어를 배우는 것, 한국 사람인 것은 숨겨야 할 것도, 창피하거나 기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야. 지금은 물리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더 많은 시간을 노출되어 있을 뿐이지. 자연스럽게.
 
또한, 아이가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학습의 목적도 아니고 스펙을 쌓아 취업을 잘하기 위한 사용목적은 더더욱 아니야. 아이의 정체성이자 일본만큼 가까운 한국의 가족들과 소통하는 입구이며, 엄마의 나라를 공감할 수 있는 열쇠라고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한국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것은 아니야.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 당신과 나 모두가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우리의 아이는 나도, 당신도 경험해보지 못한 한일 혼혈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게 될 거야. 그녀 고유의. 그런 유년기를 겪어보지 않은 당신과 나는 섣불리 아이가 앞으로 겪을 일들을 짐작할 수 없겠지. 다만 당신과 나의 책임이자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
 
아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환경은 물론 한국보다는 일본이 될 거야. 그리고 나 또한 보호자로서 삶의 터전인 일본에서 아이가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이, 한국의 정서와 감정과 언어가 묵살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 일본의 그것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지만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애써 관심을 갖고 기울여야 하는 거야.

 
그러니 당신은 날 신뢰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우리 아이를 일본에서, 당신과 함께 키울 거야.


하지만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내 존재를 지우고 아이를 키울 순 없어. 당신이 말하는 ‘모국어가 자리 잡는 10세’가 될 때까지 한국의 가족들을 진공상태인 채로 아이에게서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의 가족들과의 만남과 교감은 때 되면 놀러 가는 피서지와는 다른 거야.


그러니 조금 내 입장에서도 이해해주길 바래.


당신과 함께 마주 보며 살아갈 내가 너무 외롭지 않게 해 주길...




이걸 나는 남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될까?


그날 저녁,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써 내려갔던 일기




그 후의 이야기.


문제가 해결되었는가는 아직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욕실에서의 한국어 타임에 관해서는 터치하지 않게 되었다.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많지만 나쁘지 않은 첫걸음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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