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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Nov 28. 2020

둘째, 꼭 가져야 하나?

두 번째 출산을 열흘 앞두고 내린 결론

둘째는 일찍 나온대


첫 출산이 꽉 막힌 국도였다면, 두 번째 출산은 뻥 뚫린 고속도로라고 했다. 한 번 길이 뚫렸으니 엄청 수월 할 거라고. 초조해하는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예정일에 꼬옥 맞춰 나온 첫째였기에, 이번에는 조금 일찍 나오겠거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정일을 열흘 앞두고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것 같아 밤낮으로 걸어도 보고 안 하던 스쿼트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얻은 건 진통 아닌 요통뿐이다.


‘언제쯤 나오려나...’ 

애꿎은 배를 만지며 혼잣말을 하다, 나도 참 웃기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준비가 됐나?’란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이야 이렇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만, 실은 둘째를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이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선물 같이 다가온 첫 아이 덕분에 나는 성장했고, 풍요로워졌고, 더없이 행복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동시에 있었다. 아이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이 재편되었던 삶과 일상. 아이의 몸과 마음이 커 갈수록 일상에서도 커져가는 아이의 존재감. 그럴수록 알게 모르게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나라는 존재.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너의 존재가 선명해질수록 나는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5년여에 걸쳐 구축한 안정적인 일상을 무너뜨릴 용기가 없었다. 또다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둘째 생각을 아주 포기한 것은 또 아니어서, 회사에선 큰 프로젝트를 눈 앞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한 발 빼고 있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참 못나보였다. 


집안에선 시댁, 친정 할 것 없이 눈치를 줬다. ‘장남과 결혼한 죄’로 딸만 낳으면 ‘좀 그렇다’는게 이유였는데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준 건 다름 아닌 친정 엄마였다. 본인도 장남의 처(妻)로 첫 아이로 딸을 낳고 터울 많은 남동생을 갖기까지 맘고생을 많이 해 걱정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서른 되는 해에 첫 애를 낳고, 타향살이하며 일도 하고 시부모님과 동거까지 하는 이런 모범 답안지 같은 삶을 사는 나에게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둘째 계획은 없냐’고 숙제를 내주는 엄마의 잔소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도 조금씩 틈이 생겼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피곤하다, 출장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댔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낳든, 낳지 않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둘은 있어야지!

흔히들 둘째를 가져야 하는 이유로 첫째가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 역시 남동생이 있고 덕분에 지지고 볶으면서 심심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부모도 떠나고 의지할 곳은 형제라고 하니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확실히 형제/자매가 있는 집은 아이들끼리 놀아주니 손도 덜 가고 외롭지 않아 보였다. 친구들에게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에 부러움과 동시에 풀이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될까.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러다 옆에서 누가 성별까지 콕! 찝어서 ‘아들은 하나 낳아야지’하면 가슴이 답답... 해짐을 느꼈다. 


둘째는 수월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지쳤던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둘째는 수월하다고. 한 번 해본 것이니 여유롭기까지 할 거라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나는 임신, 출산, 육아가 좋았고 재밌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반복된다는 사실 그 자체는 걸림돌이 아니었다. 단지 그것에 몰두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미루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더러 둘째를 가지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그걸 대신 해결해 주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남편 조차도) 


애국하는 거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기긴 하다. 일본에 사는 내가 도대체 어느 나라 애국을 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디가 됐든 자부심보다는 기분이 상해서다. ‘가임기 여성’으로 분류되어 출산의 도구로 여겨지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내 안에서도 이유를 찾기 어려운데 남을 위한, 나라를 위한 이유라니. 할 수 있는 애국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하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만 하다 보니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럼 뭔가?’를 찾아야 했다. 


하릴없이 방황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이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수월하게 들어섰던 첫 임신과는 달리 두 번째 임신은 결심을 하고서도 한 두해 난항을 겪었다. 이제는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봄날의 훈훈한 기운과 함께 아이가 찾아왔다. 




‘나는 왜 아이를 낳는 거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왜 아이를 갖는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육아 6년 차. 여전히 그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답을 대신해서 육아를 시작하는 제1명제로 약속했던 것이 있다.


아이라는, 나에게 찾아온 하나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하겠다는 것. 행동 강령으로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줄 것’을 다짐했다. 


나에게 아이는 새로운 만남이다. 
이 만남은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세계이다. 

수 많은 만남과 이별이 인생에 존재하지만, 아이와의 인연만큼은 내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야 하는 약속이다. 지금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연습이 있었지만, 아이와의 만남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지속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될 것이다. 모든 첫 경험이 그러하듯이 나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길을 잃겠지만, 포기하지는 않겠노라고. 

그 옛날 우리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_ <우리 모두 엄마가 처음이다> by. 읽는 인간 
https://brunch.co.kr/@dailytokyo/9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과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약속을 떠올리며 제자리를 찾고자 했다. 


두 번째 출산 예정일을 열흘 앞두고, 나는 또 한 번의 출산이 갖는 의미를 새겨야 할 의무가 생겼다. 


왜 하나도 아니고 둘이어야 하는 건지. 큰 아이를 위한 것도, 내 몸 편하자는 것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뭔지. 부족한 엄마가 답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와중에도 뱃속의 아이는 착실히 제 몫을 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배는 불러오고 꿈틀대는 태동도 매일 느꼈건만, 있는지 없는지 실감할 새도 없이 막달이 되어서야 ‘나올 때가 되었는데...’를 고민하다니. 이대로 아이를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또 한 번 느긋하게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 것일까… 


아차!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내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선택해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민의 시작은 늘 내가 먼저였다. 내가 아이를 갖고, 내가 아이를 낳고,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에만 온갖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렇게 내 욕심 채우고자 아등바등하는 나를 아이는 먼발치에서 묵묵히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왔다. 부족한 엄마가 삐그덕 대지 않고 연착륙할 수 있도록. 자신의 등장으로 생길 일상의 균열이 너무 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일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와 준 것이다. 






【다시 마주 보기, 제대로 마주 보기】

둘째 아이의 등장은 나에게 다가온 운명을 제대로 마주 보기 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을 답을 알고 푸는 문제가 아닌, 풀어가며 깨달아가는 문제였음을. 그렇게 함께 뒹굴며 아이를 키우고 나도 커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지 가슴으로 받아 안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제는 알겠다.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나를 찾아온 운명에 성실히 답하는 것만이 삶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_『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나를 찾아온 이 선물 같은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너에게 처음을 줄게】

둘째란 없다. 둘째라는 건 나를 기준으로 한 셈법일 뿐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이다. 두 번째 임신과 출산은 ㅡ 부족했던 지난날을 채우는 재도전이 아니라 ㅡ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만남인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처음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언니가 쓰던 물건을 물려받을 일이 많을 아이에게, 엄마까지 언니가 쓰던 엄마를 물려주어선 안 될 노릇이다.


너라는 존재가 나에게 다가온 또 다른 운명임을 기억하기. 

이미 해 본 것이라는 느슨한 생각을 조이고, 새로운 눈으로 너와 마주하기.

그것이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잊지 않기. 


오래도록 끌어왔던 고민의 마침표를 이제야 찍는다. 

이제, 조금은 준비가 된 것 같다. 


부족한 엄마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아. 


아가야, 어서 와. 


2020.11.26 thu

D-10 일의 기록 



https://brunch.co.kr/@dailytokyo/9

https://brunch.co.kr/magazine/haha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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