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해냄 (2020)
오늘. 그러니까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55일이 된 날이다. 동시에 55일 만에 책상에 오롯이 홀로 앉아 생각을 글로 써내는 시간을 갖게 된 날이기도 하다. 좀 더 일찍 책상 앞에 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멀티 플레이가 되지 않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의 예열 기간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반대로 조금 더 그 시기를 미룰 수 있었음에도 지금 이 시점에 키보드와 마주할 용기를 내게 된 이유는 이 책,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를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투표에 참여한건 2007년 12월에 있었던 17대 대통령 선거다. 그 이후로 모든 대선과 총선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빠짐없이 치르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찍은 후보는 단 한 번도 대통령으로 당선된 적이 없다. 매번 당선이 안되는 것도 맥빠지지만 집 앞 동사무소가 아닌,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한국 영사관까지 가서 사전 재외국민 신청을 한 뒤에 치러야 하기에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지푸라기처럼, 다른 건 몰라도 선거만큼은 꼬박꼬박 발 도장을 찍고 있다. 그런데...
“재외국민은 투표하지 마라!”
2017년 4월. 촛불 탄핵 이후 치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해외에 사는 한국 국민(=재외국민)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유인즉슨 한국에서 세금 내고 사는 것도 아닌데, ‘한국이 싫어서’ 떠난 인간들이 ‘우리와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저들은 관찰자 내지는 방관자일 뿐,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일부 극우 세력의 주장이라 큰 소란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그들이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의 투표를 꺼려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체로 해외에 사는 재외국민의 표는 한국 내의 표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것들이,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당연하기는커녕 매우 기형적이고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교대상이 있다는 것인데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경우를 거울 삼아 지금의 비정상적이고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대면해보자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이상한 나라’ 한국은 세계가 놀라워하는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고, 노동시간이 가장 길며,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노동자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커나가야 하는 아이들이 가장 우울한 나라이며, 아이를 가장 적게 낳고, 또 서로가 서로를 가장 불신하는 나라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그런 시대착오적이고 숨 막히는 한국 사회를 농축해서 보여주는 말이라고. (4p)
사실 이런 한국에 대한 묘사가 새삼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다. 나고 자란 내 고국이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갈 때면 뉴스에선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거대 정당 간의 속 빈 강정 같은 논쟁이 끝나지 않을 연속 드라마처럼 방영되고, 혐오와 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는 코미디 쇼에선 배려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민국의 고질 병인 비교와 경쟁은 예능 프로그램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이돌을 시작으로 이제는 어르신들 좋아하는 트롯까지 가세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치 투견장에 모인 구경꾼들처럼 경쟁이라는 자극제에 취해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유튜브에서 인기라는 먹방 혹은 언박싱 영상은 거북하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바쁜 우리가 왜 이런 걸 들여다보고 있을까. 무엇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K-pop의 인기와 K-컬처, K-방역의 성과라는 국뽕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한국이 싫어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국 사회보다 더 병들어 있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것이 위안 아닌 위안이 되었는지도...)
왜 이렇게 되었을까.
더 나아질 순 없는 걸까.
방탄소년단과 짜파구리, 코로나 방역으로 차올랐던 국뽕은 거기까지다. 현실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8년째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은 그놈의 ‘스펙’과 ‘졸업장’ 때문에 허우대 멀쩡한 놈이 사람 구실 못한다고 손가락질받는다. 부동산 대책이 바뀌어 들뜬 마음도 잠시, 상위 10%가 부동산의 97.6%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내 집 마련이란 애초에 이루지 못할 허황된 꿈이었음을 똑똑히 확인시켜준다. 노인 빈곤 문제도 안심할 수 없다. 44%에 달하는 노인 빈곤율은 거의 둘 중 하나의 확률로 내 가족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뭉뚱그려 버리기엔 그렇지 않은 삶이 한국 밖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제도 밖의 삶을 선택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 봤자 너도 ‘한국이 싫어서’ 뛰쳐나온 부류 아니냐, 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 온 주제에 뭔 관심이 그렇게 많냐, 신경 끄라, 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사자가 아닌 한 발 빼고 있는 방관자인 내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재외국민 투표는 스스로에게 주는 마지막 면죄부였는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새벽시간, 수유등에 의지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저자의 통찰력에 깊이 공감하면서 ‘과연 어떤 결론으로 마무리될까’ 두근거리면서.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68 혁명의 부재에서 왔다는 해석이 명쾌했다.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68 혁명의 구호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조금 더 일찍, 68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물줄기가 우리 사회에 다다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제도, 젠더, 문화, 그리고 인간에 의한 환경의 억압까지도 모두 풀어헤칠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신경 끄라’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나에게도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의 광범위한 병폐에 대해 두루 다루고 있는 이 책의 결말은 ‘통일 한국’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사실 내가 가장 공감했던 건 ‘교육 혁명’ 부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유튜브에서 김누리 교수님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반갑게도 이 책의 모티브가 된 <JTBC 차이나는 클래스> 외에도 교육혁신과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관한 강연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단 링크 참조)
_한국인으로서 우리들이 받은 교육은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군사문화의 잔재가 깊게 배어 있는 교육이었고, 인권을 경시하고 끊임없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반교육’에 가까웠지요. 이런 반교육, 파쇼 교육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내면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이었던 것입니다.
_<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해냄 중에서
모든 강연이 가슴을 울렸지만,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독일 초등학생들의 데모 시위를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교육철학 아래, 68 혁명 이후 비판교육, 반권위주의 교육, 과거청산 교육, 공감 교육을 축으로 하는 교육 개혁을 감행한 독일이 키워낸 아이들. 그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나와 외치는 것은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는 구호였다. 난민 수용에 있어 합법과 불법을 나누어, 불법으로 넘어온 난민들은 강제 송환하겠다는 베를린 시의 규정에 반대하며 모든 난민을 수용하도록 하라는 주장이었다.
그 아이들이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울타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것인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고작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난민 수용 문제를 알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 여기고, 함께 아파하며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시위가 가벼운 퍼포먼스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시 교사들의 지지 성명과 베를린 교육청의 공식 성명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베를린시는 불법 난민자들의 강제 송환을 철회까진 아니어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교과서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하나의 교실이 되어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수용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부러웠다.
우리가 행동하면 세상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을 일찍이 맛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자부심과 행복함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설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교육 혁명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이미 충분하다. 비판적인 사고와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며 연대할 수 있음을 가슴으로 느끼는 일.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자연, 우리가 사는 지구를 함께 지켜야 한다는 생태 감수성을 갖는 일이 우리 아이들이라고 왜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이런 책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가도 이내 시들해지는 이유는 ‘어차피 안될 것 같아서’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이 민주주의자가 되지 않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안정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다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입니다.
_<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해냄 중에서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태도가 그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도.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치 지형을 변화시켜야 한다. 책에서도 나왔듯 대의 기관인 국회가 왜곡되지 않는 대표성을 갖는 것이 절실하다. 작은 목소리도 그 나름대로 반영이 되는 민감하고 성숙한 의회를 갖기 위해선,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정당들이 만들어지도록 지지하고, 그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느리지만 분명히 가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다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먼 발치에서 안타까워하며 발만 동동 구를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킨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외국민의 투표율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재외유권자 29만4633명 중 역대 최다인 22만1981명이 참여해 75.3%의 투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한국을 떠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재외국민이 새로운 지지세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바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 처럼 우경화된 한국의 삐뚤어진 정치지형을 건전하게 바로 잡기 위해서, 보다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의 출현이 필요하다. 재외국민 진영이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일 보도되는 고국의 뉴스를 보며 짜파구리가 주는 국뽕의 달콤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다면 ...
제도 밖의 방관자인 내가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아이와 손 잡고 투표장에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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