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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Apr 12. 2021

오늘, 나를 리셋합니다

완벽한 다음보다 완전한 지금을 느끼기.

4월로 접어들었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둘째 아이는 보육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났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역시나 속상하다. 사실,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엄마인 나에게도 기념비적인 4월의 시작을 이런 식으로 한 문장에 퉁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학식의 감동과 앞으로의 포부를 한 장면 한 장면 정성스럽게 글로 그려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흩날리는 벚꽃잎을 배경으로 란도셀을 맨 아이의 뒷모습을 멋있게 사진으로 남겨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씽크대에 쏟아 붇듯, 안달 난 마음을 그냥 이렇게 한 문장에 실어 보내주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 아이로부터 시작한 콧물감기가 이어달리기처럼 나와 남편, 둘째와 시아버지에게 차례로 옮아갔고, 면역력이 떨어진 몸으로 밤새 아이들의 준비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나니 누적된 피로와 고인 콧물 때문에 중이염과 외이염이 같이 도졌다. 보육원 때문에 낮 수유를 끊으면서도 밤 수유만큼은 첫 돌까지 고집하고 싶었는데, 이비인후과에서 항생제와 진통제를 함께 복용하라는 처방을 받게 됐다. 하루아침에 끊게 된 모유수유 때문에 며칠을 유선염에 시달리고 있다. 가슴 여기저기에 멍울이 졌고 온몸은 열이 펄펄. 등짝은 두드려 맞은 듯 아프다.


챙기지 못하고 질질 흘리는 것들이 늘어간다.

벌여만 놓고 수습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인다.


이 독서 노트만 해도 그렇다.

실은 지난 독서 모임에서 함께 쓰기로 한 감상을 쓰지 못했다. 출산과 육아의 산을 넘으며 독서 노트를 남기지 못한 일은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동안은 '사정이 있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못 쓰고 넘어갈 것 같아요' 라며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변명도 계속하면 내성이 생기는지 이번엔 아무 말도 않고 슬그머니 제출하지 않은 채 기한을 넘겨버렸다. 그렇지만 솔직하지 못했다는 건 나도 알고, 함께하는 모두도 아는 사실일 터.


뭐가 그리 바빴을까. 왜 자꾸 허덕이게 되는 걸까. 시간이 없으면 욕심을 버리면 되는데,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도 욕심도 두 손에 꽉 쥔 채 엄한 힘을 쓰고 있다. 그럴수록 마음만 바쁘고 제대로 마무리 짓는 것은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닌데.




내려놓기란 쉬워 보이지만 의외로 어렵습니다. 내려놓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이걸 못한다고 하면 바보 같아 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 즉 '더 열심히 해야 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점점 자기 혼자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_『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이치다 노리코, 드렁큰 에디터 (2020)


답답한 마음으로 읽기만 하자고 펼쳤던 책에서 찾고 있던 물음의 답을 찾았다. 예상대로였다. 인정하지 않았던 거다. 지금, 나는, 못한다, 는 사실을. 눈 앞의 문제들을 처리할 재주도 없는 주제에, 다른 새로운 일을 두 개 세 개씩 벌리며 마치 이것도 저것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렇다'라고 확인하고 나니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무언가를 더, 완벽하게, 끝까지, 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자고. 못하면 못한다고도 해보고, 쓸데없이 열심히 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하고, 정답을 찾는 일도, 칭찬을 기대하는 마음도, 혹시 몰라서 하는 준비 같은 것도 제발 그만두자고. '적어도 남들만큼' 하는 마음도 그냥 다 내려놓으라고. 그렇게 삶 속에서 나를 옭아매던 일 들을 하나둘씩 그만두어 보는 것. 그것이 불확실한 인생에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라고 책이 말했다.


‘그만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두기까지의 과정은 제가 어떤 것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이해하며, 재정의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를 그만둘 때마다 몸과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_『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이치다 노리코, 드렁큰 에디터 (2020)




열심히 북마크를 하며 읽다 먼저 줄 긋기를 그만 두기로 했다. 


어차피 책에 나와 있는 지침들은 저자의 것이며, 그마저도 나에겐 더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줄 긋기를 안 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건 좋은데, 이건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내 안의 '열심 DNA'가 움찔움찔 고개를 처 들었지만 다스리기로 했다. 밑 줄 치지 않고 귀퉁이 접지 않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책 한 권을 읽어나가는 일은 뭉쳐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가는 연습이자 과정이었다. 힘주기보다 힘 빼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책을 덮은 지금은 두 가지만 남기기로 했다.


지금 내가 가진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생각하고 움직이기.

완벽한 다음보다 완전한 지금을 느끼기.


사실 이렇게 말해놓고 오늘 다르고 내일 또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지금도 아이가 가져온 가정통신문을 확인하며 매일이 들쑥 날쑥한 스케줄에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중이니까. 듬성듬성한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잘 살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아직 좀 어른이 못되면 어때.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되지.


오늘, 나를 리셋합니다.


*cover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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