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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Mar 10. 2021

나는 여전히 엄마가 등을 밀어준다

『아무튼목욕탕』정혜덕,위고 (2020)

타향살이하며 잊어버리고 둔해지는 감각들이 있다. 식용유 냄새 폴폴 풍기는 명절 음식을 집어 먹는 일이며 갓 담은 짭조름한 겉절이 김치에 보쌈 수육 싸 먹는 일. 가족들의 음력 생일을 챙기는 일. 친척 언니의 결혼식에서 4촌의 8촌쯤 되는 먼 친척 어른을 만났을 때 어찌할 바 모르겠는 그런 느낌들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몸이 기억하고 반응해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해마다 한국에 들어가면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꼭 찾게 되는 곳. 목욕탕이 그렇다.


유리문을 열면 온몸이 따뜻한 기운에 휩싸인다. 각종 비누와 보디클렌저, 샴푸 향이 살 냄새, 물 내음과 뒤섞여 콧속으로 밀려든다. 목욕탕에 들어와 겨우 숨 한 번 들이쉬었을 뿐인데 몸과 마음이 반은 녹은 것 같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타일 벽과 바닥에 부딪혀 부서지고 울리다가 물소리와 합쳐져 귓가에 번진다. 명확하게 인식되는 소리가 없어서 오히려 안심이 된다. 알아들어야 할 말, 듣는 순간 반응해야 하는 말에 치였던 귀가 비로소 쉴 수 있다.

_『아무튼, 목욕탕』 정혜덕 위고 (2020)


[아무튼 시리즈]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아무튼, 목욕탕』 의 첫 장을 펼치자 촉촉하고 뿌연 수증기처럼 목욕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나의 어린 시절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에게 목욕탕의 기억은 엄마와의 기억이다. 목욕탕을 혼자 가는 일은 거의 없었고, 친구와 가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며 이제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그런 곳이 됐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목욕탕에는 분명 있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했던 목욕탕의 기억이 유독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그 시간이 우리에게 절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활동을 했던 엄마는 어쩌다 신실한 불자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어 신혼 초 갖은 종교적 탄압 아닌 탄압을 받아야 했다. 교회 다니는 며느리를 고깝게 생각하는 할머니의 눈을 피해 엄마가 선택한 것은 바로 목욕 바구니. 구멍이 숭숭 난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에 수건으로 성경책을 정성스레 돌돌 말아 척 올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목욕 다녀올게요’하며 집을 나서곤 했다.


덕분에 나는 엄마의 신성한 종교 활동의 공범 아닌 공범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우리의 비밀스런 목욕탕 작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교회는 안 되고 목욕탕은 된다니. 진정, 목욕탕이란 모두가 화해하고 용서받는 곳이로구나.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남았다.


물론 개 중에 한두 번은 ‘진짜’ 목욕탕 행도 있어서 엄마의 알리바이는 무사히(?) 성립될 수 있었다. 엄마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엄마는 ‘프로 목욕러’였다. 엄마의 목욕 바구니는 단출하지만 효율성의 집대성이어서 샘플로 받은 샴푸 린스를 허투루 쓰는 일이 없었고,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냉장고 속 흰 우유와 딸기맛 요플레도 목욕 가는 날이면 온몸에 쓱쓱 발려 제 소임을 다했다. 폭이 좁고 높이가 긴 탈의실 옷장에 훌렁훌렁 벗은 옷을 쓰러지지 않게 켜켜이 개워 올리는 것은 가히 묘기에 가까웠는데, 내가 벗어 놓은 옷들은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옷장 문을 열 때마다 푹 꼬꾸라지기 일쑤였다.


힘차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 엄마의 발걸음에는 걱정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입구에서 바가지 두 개, 의자 두 개, 세숫대야 두 개를 챙겨 겨드랑이에 끼고 앉을자리를 찾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은 듬직했다. 엄마가 선호했던 건 앞 거울이 있는 호스 자리였는데 둘이 나란히 앉는 것이 정석이지만 어쩌다 자리가 하나밖에 나 있지 않아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 2인용인 듯 우리는 앞뒤로 비스듬하니 앉아 포메이션을 꾸렸다.


엄마는 그렇게 온탕과 열탕 사우나실을 오가며 때를 불리고 내 몸 구석구석 엄마 몸 구석구석의 묵은 때를 밀어냈다. 탄탄한 가슴과 다부진 어깨, 뽀얀 허벅지 살. 나에게 익숙한 엄마의 알몸. 단단한 엄마의 살결이 좋았다. 해를 거듭하며 나의 기억과 엄마의 실재에는 갭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팽팽할 것 같았던 엄마의 몸이 중력과 씨름하다 결국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이따금 한국에 들어갈 때면 그 차이는 더 크게 보였다.


어른이 되면 엄마 등을 시원하게 밀어줘야지. 제대로 된 효도를 하겠다고 그렇게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뤄두었는데 이제 내 손으로 엄마를 밀어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다는 사실이 아프다. 이제 나는 그때의 엄마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요령이 없고 서툴다.


언젠가 아이와 셋이 간 목욕탕에서 할머니가 된 엄마는 여지없이 내 등을 밀어주려 했다. ‘애도 있는데, 나 참…’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손 맛을 거부할 수 없어 애매한 웃음으로 딸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순순히 등을 내주었다. 1년 만의 목욕이었고, 때는 까도 까도 계속 나왔다. 지치지도 않는지 엄마는 손녀딸의 보드라운 엉덩이도 쓱쓱 싹싹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등만 밀어줘’ 라니. 그 날의 기억이 좋았는지, 딸아이는 한국에 가면 9박 10일 내내 목욕탕을 가자고 보챈다.


찜질방도 생기고 맥반석 사우나도 있지만 동네 목욕탕이 좋다. 아니, 엄마랑 같이 가는 목욕탕이 좋다. 나 잘났네 하고 지팔 지가 흔들고 다니는 나이가 되어도 목욕탕에서 만큼은 엄마 앞에 순종적인 딸이 되니까. 목욕탕 의자에 등을 구부려 쭈그리고 앉은 이 자세가 나쁘지만은 않다. 엄마와 한바탕 말싸움을 겨루고 향했던 목욕탕에서도 묵묵히 엄마는 등을 밀어주었다. 엄마 미안해, 그땐 내가 잘못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등을 내주고 등을 밀어주는 모녀간에는 화해의 강이 흐른다.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엄마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해야겠다. 우리 엄마 아직 팔팔하네, 우리 엄마 여전해! 목욕탕에서의 엄마는 영원한 나의 히로인이니까.




책을 읽으며 머릿속이 이토록 수다스러운 것도 오랜만이다.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만큼이나 할 얘기가 많아서 어수선한 마음을 글로 적는데 한참이 걸렸다. 추려보니 책으로 시작해 결국 내 얘기가 됐다. 늘 이 모양이니 서평이고 리뷰고 쓸 깜냥이 처음부터 못된다. 누구를 위한 읽기 누구를 위한 쓰기가 되지 않는 내가 늘 아쉽다.


혹 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도 목욕탕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 당신의 목욕탕을 떠올리며 일독을 해보시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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