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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는 이작가 Jan 26. 2018

어느 단역 배우에 관한 기억

그 사람은 자기가 '배우'라고 했다.

고사를 마치고 이동한 식사 자리였을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원래는 고사를 지내면 잘 되라는 마음 안고 집으로 가는데, 그날은 단체로 실려 식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흔히 뒷풀이나 어쩌다 회식 자리에 따라가게 된 시나리오 작가는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 하나 데려올걸' 하는 미치겠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게 되는데, 그날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아니면 어느 배우분이 챙겨줬던가....아무튼 어느 자리였는지가 명확치 않아서 그날의 기분만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어떻게 같은 상일지 테이블일지에 마주앉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는 채로, 우연히 앞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웃는 상의 사람 좋은 얼굴(즉- 미남은 아니다)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코가 좀 퍼진 순박한 얼굴로, 정말로 내내 웃는 눈을 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현장 스태프나 막내 매니저 쯤 되려나 했는데, 전혀 모르는 얼굴의 그는 자기가 배우라고 했다.


"배우세요? 아...예, 그러시구나...."


심지어는 이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는데 연출자랑 친해서 밥 먹으러 왔다며 웃었다. 그리고 곧 어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될 거라고 했다.

"아, 예...그러시구나...." 하고 말았다. 다른 얘기는 기억 나지도 않고, 그러다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전혀 모르겠고, 그 사람을 다시 알아 보기 전에는 이 순간 조차 기억에 남지 않았다.



배우 진선규의 이야기다.



작년, 영화 '범죄도시'로 남우조연상을 받고 눈물의 수상 소감을 남겼던, 그 사람이다.

나는 그 영화도 안 봤고, 영화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영화제나 시상식도 안 챙기게 돼서 화제가 된 수상소감도 인터넷에 하도 돌길래 보게 될 수 밖에 없어 보게 되었다.

'음.....저 사람이구나.....'

몰랐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군지 연기를 되게 잘했나 보네', '고생 많이 했나 본데 잘 돼서 다행이네', '역시 저런 시상식엔 이변의 주인공이 좀 있어줘야 이벤트가 되지.'.....

말끔히 잊혀진 그 사람을 연말 끝자락에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다가, 그것도 한참 보다가 알아봤다.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예전 사진들에 그때의 얼굴이 있었다.

웃다가 맞은 느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근데 느낌이 아니라 정말 딱 그런 상황이 됐다.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당연히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라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 만남 자체가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말끔히 잊었었다.

그 당시 그가 말한 드라마에서 용케도 그가 나오는 장면을 보게 됐는데, 그나마도 그는 그날 총을 맞고 죽어버렸다.  '쯧쯧......단역인데 죽어버리다니.....' 라고 한 것이 그냥 끝이었다.

사람 좋게 웃었지만 너무 평범했고, 될성 부른 아우라도 느껴지지 않는 순박한 웃는 얼굴이었다. (근데 사실 배우 아우라는 게, 대개 너무 잘생겨서 놀라는 거나 생각 보다 잘생겨서 놀라거는 것과 헤깔려 말하는 것 같긴 하다.)

그런 그가 10년이 훌쩍 넘어, 아니, 10년을 계속해서 배우로서 자신의 일을 해오고, 상을 받고, 인기 프로에 나와 유재석이 신기해서 여전히 그 웃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주위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 또 이런 걸 했네, 저런 걸 했네, 할 때 마다 잠깐씩 부럽기는 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잘 나가네, 좋겠네, 뭐 저정도는 아닌데.....하면서, 친구를 만나고 다른 미팅을 하고, 금새 무기력해졌다. 그 잘난 사람들이 또 더 뭘 한다고 한들, 지난 해 그 순간, 그 배우를 다시 본 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 할 것이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할까......

가끔 SNS를 하다가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갖춰 가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익명의 목격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 배우는.....너무 느닷없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나에게는 그랬다는 거다.) 만약 내가 중간에 잠깐이라도 이 사람을 기억했다면, 그렇더라도 배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전혀 상관 없는 자영업이나 다행히 아버지가 잘산다면 하는 사업 같은 걸 물려받고 살겠지,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거다.

그러니까 정말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할까......


모르겠다, 그냥 '진선규의 기분'이라고 해두자.  

난데없이 나타나 나의 무기력을 후려 친, 2017년의 '지니(Ginie)', 배우 진선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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