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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토리 Dec 14. 2023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쉰 살의 유학일기 - 겨울편 #2

어젯밤에 눈이 내렸다.

지루한 수업시간, 사전을 찾는 척하면서 맛집을 탐색했다.

이런 날 텅 빈 집에서 도시락 먹고 싶진 않아.

혼밥이라도 정말 맛있는 집에서 먹고 싶어.

가정식백반을 먹고 싶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집밥 같은 밥다운 밥을 먹으면서 나를 대접하고 싶었다.

어제 학기말 시험도 잘 봤으니까 먹을 자격 있어.

시험을 못 봤으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먹었겠지만.

걸어서 20분 거리에 리뷰가 제법 좋은 가게가 있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 집으로 향했다.

볼때기가 찢어지게 추운 데다가 눈길이 얼어 가는데 30분도 넘게 걸린 것 같다.


日替わりセット(오늘의 정식)

기대했던 대로 정갈하고 맛있는 한상차림이었다.

렌지에 억지로 데운 도시락, 간이 쎈 식당밥이 아니라 슴슴한 손맛의 반찬과 방금 오븐에서 꺼낸 뜨거운 그라탕이었다.

꽤 입소문이 난 집인지 나 같은 중년의 아줌마들로 가게가 꽉 차 있었다.

여기, 단골이 될 것 같다.

후식으로 커피를 시키는데 나이 지긋한 주인할머니가 물었다.


일본인이 아니신 거 같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인이에요.


아, 저기 창가에 앉아계신 분도 한국인인데. 이리 와보세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주인할머니는 창가에 앉은 두 여자를 부르며 나를 소개해 버렸다.

외로움에 눈발을 헤치며 여기까지 밥 먹으러 온 내가 이런 새로운 인연을 마다할 리가 없지.

반가움에 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높아졌을 거다.

하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아무리 삿포로에 한국인이 얼마 없다 해도 목적도 없이 우연히 식당에서 밥 먹다 만난 인연에 무게를 둘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상대는 동행도 있고 나처럼 혼자 살아 심심할 사람도 아닐 텐데…

어디 사느냐, 삿포로에 언제 왔느냐, 무슨 일로 왔느냐, 나에게 형식적인 질문을 하던 상대방이 혹시… 하며 물었다.


혹시… 탁구 치세요?


네! 어떻게 아세요?


그럼 OO 씨 아세요?


그럼요. 그럼요!!


오모나, 세상에…

오늘 만난 사람의 남편과 나랑 같이 탁구 치러 다니는 OO 씨의 남편이 같은 직장에 다녀서 두어 달 전에 부부동반으로 만났었단다.

그때 OO 씨가 내 얘기를 (삿포로에 혼자 어학연수를 온 51살 아줌마) 하면서 둘이 연배가 비슷해서 같이 만나도 좋을 것 같다 말했었는데 어쩌다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는 바람에 그냥 지나가는 말이 되어버렸었단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고, 반가움과 신기함에 아예 내 의자를 가져다 옆에 놓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내 이력이 특이하긴 한가 보다.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은 걸 보면.

세상 참 좁기도 하지.


OO 씨는 지난 9월,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낸 탁구장에서 만난 37살 한국인이다.

일본어가 지금보다도 더 안 됐을 때 너무 심심해서 무작정 찾아간 탁구장 주인이 한국인 한 명 있다고 같이 레슨 받을 수 있게 연결해 줬었다.

나보다 띠동갑도 더 나는 젊은 친구지만 그 친구 덕분에 주 1~2회 탁구도 배우고, 한 달에 두 번 요리교실도 나가고, 올 겨울 스노보드도 배우게 되었는데 이렇게 또래 친구까지 만나게 되다니!


우리를 이어준 당사자도 없이 (이어줬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서로 사는 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각자 우연히 밥 먹다 말고 생긴 인연.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만날 줄이야.

한국인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자들만의 살가운 오지랖이 순식간에 삿포로 대통합을 만들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이런 굉장한 우연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삿포로 대통합의 자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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