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겠습니다

쉰 살의 유학일기 - 준비 #13

by 히토리

이 글은 삿포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아마 삿포로 도착 후 호텔에서 올리게 되겠지.


친정엄마와의 전쟁(?) 후,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직 퇴원하지 못한 딸아이 덕분에 병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날들…

빨리 떠나버리고도 싶고 다 때려치우고도 싶은 어지러운 마음들…

뭔지 모르게 가슴속에 꽉 들어찬 갑갑한 감정들을 어딘가 뱉어버리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친정아버지가 사위에게 전화를 하셨다.

평소엔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하셨는데 아무래도 엊그제 난리 친 여파 때문에 내게 전화 걸기가 부담스러우셨나보다.

지난번 강아지를 맡기고 오면서 택배로 안전문을 주문해 드렸었는데 그게 도착해서 조립하는 와중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O서방, 그 안전문이 머가 문제인지 간격이 안 맞아서 문이 안 닫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이거?”


아부지… 이 사람이 알 리가 있나요… 어찌 생겼는지 보지도 못한 물건일 텐데요. ㅜㅜ

딸의 심기를 건드릴까 사위에게 전화한 아버지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통화에 당황해하는 남편의 모습도 그렇고 웃픈 코미디다.

둘이서 사진을 찍어 보내네 어쩌네 이리저리 통화하더니 남편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버님, 버리세요!”


“어? 아니…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면… 교환이나.. 아니, 그게…”


“안되는 거 붙들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버리세요. 괜찮습니다!”


빵 터졌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결론이다.

아버지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나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결론은 내가 반품신청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지만 남편의 신박한 해결책 덕분에 속이 조금 후련해지긴 했다.


“넌 참 편리한 사람이야. 옆에 두면 정말 편해. 말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어떻게든 해결을 해주거든.

그게 자기의 사명인 것처럼 정말 열심히 완벽하게 해결해 주니까 다들 너만 쳐다보잖아.

너 여기 있으면 그런 관계에서 절대 못 벗어나.

나도, 애들도, 장인어른, 장모님, 우리 엄마, 모두 너 없으면 많이 불편하겠지만 그럭저럭 다들 잘 살 거야. 그렇게 살아야만 하고.

너 없는 1년 동안 다들 우당탕탕 살면서 잘 적응할 거야. 맘 푹 놓고 편히 다녀오셔. “


그랬다. 나 같았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아버지한테 설치법을 가르쳐 드렸거나 오밤중에라도 차 몰고 두 시간 거리 친정에 다녀왔을 거다.

해결을 해주고 뿌듯해하면서도 반면으로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힘들어했을 거다.

지금 떠나고 있는 이 긴 여행은 어학연수가 아니라 독립여행인지도 모른다.

나를 정확하게 파악한 남편은 자기가 가장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위해 1년이라는 공백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과 거리를 통한 관계에서의 공백.

그 안에서 쉬면서 나를 정돈하고 오라는 의미 같다.


“갔다 와서 다들 너 없이 너~무 잘 산다고 정봉이 엄마 마냥 섭섭해 하지나 말어.

자네 신세 스스로 볶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만. “




큰아이의 퇴원과 나의 출국이 겹친 날.

큰딸의 퇴원은 막둥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편은 출근 전에 나를 공항버스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내 손을 꼭 잡아준 남편


세상 든든한 저 손을 놓고 이제 나 혼자 살러 간다.


잘 놀다 오겠습니다.

제대로 쉬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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