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서시오

쉰 살의 유학일기 - 여름편 #7

by 히토리

캐릭터 좋아하는 큰딸이 부탁을 했다.

좋아하는 캐릭터 전시가 마침 삿포로에서 열리니 자기 대신 가서 굿즈를 사달라고 했다.

보내준 링크를 따라 들어가니 무척 인기 있는 전시인지 온라인으로 티켓을 예매해야 했다.

번역기 돌려가며 겨우겨우 일요일 오후 티켓을 예매했는데 이게 또 쉽게 될 리가 없다.

온라인에서 예매한 QR코드를 들고 24시간 이내에 근처 로손편의점으로 가 돈을 지불하고 실물티켓과 교환해야 한다.

나 일본 온 지 2주밖에 안 됐다고!!

편의점 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손님이 없을 때 호다닥 들어가서 점원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 겨우 티켓을 구입했다.

은행 ATM처럼 생긴 기계에 내가 받은 QR코드를 찍고 입장료 1000엔을 넣으면 영수증이 나온다.

이 영수증을 편의점 점원에게 보여주면 실물 티켓을 준다.

요새 다들 애플페이며 앱카드 쓰는데 휴대폰으로 결제하고 받은 QR코드로 입장하고 하면 되지 이 나라는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겠나 싶다.

아무튼 2주 전에 무사히 티켓은 구했고 오늘 시간 맞춰 전시장으로 갔다.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캐릭터.


4시 입장 티켓이었는데 일찍 줄을 서서 빨리 들어갈 생각으로 좀 일찍 갔는데 벌써 줄이 세 줄, 네 줄… 길게 늘어놓으면 10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맨 뒷 줄에 섰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와서 표를 보여달란다.


“이 줄은 세 시 입장 줄입니다. 손님은 4시 A그룹 입장이니 3시 50분까지 여기로 다시 와주세요. “


표를 보며 설명을 해주길래 봤더니 정말로 티켓에 ‘A 64番‘이라고 쓰여있다.

64번은 뭐지? 전시장 안에 지정좌석이 따로 있나?

30분 정도 근처를 서성이다가 정확히 3시 50분이 되자 안내하는 사람들이 4시 입장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3시 입장객들은 다 전시장 입구로 사라졌고 4시 티켓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이것도 아무렇게나 서면 안된다.

바닥에 번호가 붙어 있는데 자기 번호로 가서 서야 했다. 64번은 좌석번호가 아니라 줄을 설 때 서야 할 내 자리 번호였다.

절대 새치기를 할 수 없는 줄서기 방법이다.


A 64番, 하나하나 지정된 바닥 자리

들어가 보니 농담곰과 먼작귀(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로 유명한 - 나는 모르지만 -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나가노’의 전시회였는데 작년에 도쿄에서 전시회를 처음 시작하고 가나자와, 오사카, 후쿠오카를 거쳐 삿포로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라 한다.

삿포로 다음으로 교토, 미야기, 시즈오카, 아이치까지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일본 전국 순회 전시회인 모양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작품의 원화와 밑그림, 러프 스케치 등을 볼 수 있고 캐릭터 굿즈 판매장도 있다.

신기하게도 전시장에는 대부분이 성인이었다. 어린이는 정말로 열명도 안 됐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엄청 많았다.

다들 감탄하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고 하는데 나는 사실 작품보다는 사람 구경이 더 재미났다.

도대체 무슨 내용의 만화이길래 어린이, 청소년도 아닌 어른들이 바글바글한 걸까?

이렇게 폭넓은 연령대가 캐릭터에 열광하다니 일본을 캐릭터 천국이라 할만하다.


전시된 작가의 원화와 러프스케치들
포토스팟에서 사진은 안 찍었지만 이건 재밌어서 줄서서 해봤다. ^^


굿즈 판매장으로 가서 홍콩에 여행가 있는 큰딸과 영상통화까지 하며 사 오라는 굿즈를 샀다.

이게 뭐라고… 주먹만 한 솜인형 하나 사려고 이 난리를 쳤나…

전시회인 줄 알았으면 미리 작품도 보고 사전 정보를 알아갖고 올 것을 굿즈를 사다 달래길래 팝업스토어인 줄로만 알고 갔자나!!

내용이 궁금하다. 짱구처럼 은근 야한(?) 내용인가? 아니면 보노보노처럼 울림이 있는 만화인가?

스타일을 보면 약간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일 것 같기도 하고…

시간 내서 나가노 작가의 작품을 꼼꼼히 봐야겠다.




오늘 전시회 줄을 서며 느낀 건데 일본 사람들은 참 줄을 잘 선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질서의식이 높아져서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줄을 잘 선다.

그런데 일본은 꼭 줄을 서야 할 곳 바닥에 줄이 그어져 있다.

지하철 승강장, 역 티켓 발권기, 은행 ATM, 편의점, 마트, 카페, 베이커리 등의 계산대에도 줄이 그어져 있든 발바닥이 그려져 있다.

왜 자리를 정해줄까? 코로나 이전에는 없었는데 코로나 이후 거리두기 하라고 이렇게 해놓은 걸까?

사람들은 또 그 자리에 참 단정하게도 서 있는다.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그동안은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오늘 ‘A 64番’때문에 생각하게 된다.


지하철 오사카 난바역과 우리집 앞 편의점 계산대의 줄서기 표시

일본에 ‘민도(民度)’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시민의식이다.

일본인은 스스로 민도가 높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스스로 만든 민도에 가둬놓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든 질서가 필요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줄을 서는 것이 높은 시민의식이지 하나하나 일일이 체크하고 정해주는 것을 잘 지키는 것이 높은 시민의식은 아니다.

내가 이방인이라 그럴까, 일본의 질서는 자연스럽지 않다. 갑갑하다. 어우러지지 못하고 차단당하는 기분이다.

왠지 본질보다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것 같은 느낌.

너무 화려하고 이쁜 일본의 도시락이 그리 맛있지 않은 그런 느낌.

아직 한국에서의 습관 때문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른쪽에 서고, 버스정류장에서 줄 서는 방향을 헷갈려 맨 앞에 서버리고, 길을 걸을 때 정신 차리고 보면 나만 거꾸로 거슬러 걷는 경우가 있다.

본의 아니게 めいわく(메이와쿠,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로 가는 나를 보면 일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려나.

외모가 비슷하니 아주 민도 낮은 사람 취급을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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