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일본이야?

쉰 살의 유학일기 - 준비 #3

by 히토리

나의 아버지는 한일 혼혈이시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945년생 해방둥이.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할머니는 세 번째 아기를 배에 품은 채 해방을 맞이했고 그 해 10월(음력 9월), 아기를 낳기만 한 채 친정 식구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딸은 필요 없다는 시댁 식구들 말에 서너 살 먹은 딸만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후 나의 아버지는 새어머니 밑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해방 후의 팍팍한 세상을 살아내셨다.




내 나이 열 살 즈음이었을 거다.

큰아버지가 그 당시 매우 커다란 이슈였던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일본에 살고 계신 할머니를 찾았으나 이미 그곳에서 재가를 하신 탓에 만남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엄마가 안 찍겠다며 화를 내는 바람에 어색한 분위기에서 눈치를 봤던 기억이 있다.

그 가족사진은 일본의 할머니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고 엄마는 키워준 계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사진 보내는 걸 마뜩찮나 하셨다고 한다.

이런 사연은 나중에 나중에 내가 다 어른이 되어서야 들었다.


세월은 흘렀고 나도 결혼해서 두 딸을 낳았다.

2005년, 친정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해서 후쿠오카로 가족여행을 떠났었다.

온천도 하고 관광도 하고 참 즐거웠는데 두 번째 날 저녁인가 부모님이 다투셨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일본어가 유창한 가이드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일본인 어머니의 주소와 연락처를 주며 전화를 해주기를 원했고 엄마는 이번에도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이미 한번 거부했는데 왜 또 상처를 들쑤시느냐는 엄마에게 아빠는 생사라도 알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셨다.

결국 가이드의 이러저러한 노력으로 외삼촌(할머니의 남동생)과 연락이 닿았고 아직 살아계시며 재가했던 남편과 사별하고 이혼으로 혼자된 딸(당시 데리고 갔던 딸)과 둘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외삼촌이라는 분은 60년을 잊고 살았던 사람, 죽었다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라며 단호하게 더 이상의 연결을 거부했다고 한다.

생모로부터의 두 번의 거절.

나의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셨을까…


또 세월은 10년쯤 흘렀고, 애들 방학에 맞춰 오사카에 가서 놀다왔다 말했을 때 아버지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리셨다.

“돌아가셨겠지…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면 목소리라도 들어봤을 텐데. 공부 좀 해둘걸. “

그때부터였다. 일본어가 내 평생의 숙제처럼 되어버렸다. 느낌이 그래져 버렸다.

내가 일본어를 배워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어 줄 수 없지만 왠지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내가 일본어를 공부한다 했을 때 핏줄이 당기나 보네 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사연, 왜 하필 일본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장난스레 말했다.


“간판이랑 메뉴판 읽어서 맛있는거 사먹을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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