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의 유학일기 - 가을편 #8
나는 운전 경력 27년 무사고 베스트 드라이버다.
스물다섯 살 때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작은 차 큰 기쁨(이 로고 나름 유명했었는데)‘ 빨간 슈퍼 티코를 36개월 할부로 사놓고 쫓겨날까 봐 집에 말도 못 하고 차를 구입했던 대리점에 부탁해서 2주 가까이 주차시켜 놨었다.
그리고 휴가 나온 운전병 남동생을 서울역에서 납치(?)해서 무작정 차를 몰게 해 집으로 갔다.
딸이라면 험한 말은커녕 눈에 힘주고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이뻐했던 우리 아부지는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친년’이라 하셨고 그런 아부지의 반응에 놀란 엄마는 사고 친 나 대신 차를 몰고 온 엄한 남동생만 쥐어박았다.
사고뭉치 누나 때문에 맨날 눈치만 보던 남동생은 휴가마저 살얼음으로 쥐 죽은 듯 보내다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음 날인 현충일.
그때는 현충일이 휴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 자기 차를 몰고 다니던 대학동기를 불러내 조수석에 앉히고 - 혼자는 조금 겁났고, 남동생은 죽어도 내 차 안 탄다고 했다. 혼날까봐 - 동네 몇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운전연수를 대신한 나는 다음날 새벽 4시에 차를 몰고 출근했다.
출퇴근길 혼잡한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혹시나 부모님이 차 몰고 못 가게 막을까 봐 몰래 새벽같이 빠져나왔었다.
그날 이후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운전을 한 듯하다.
차를 몰고 방방곡곡 여행을 다니고, 서울-대전 고속도로를 달리며 장거리 연애를 했고 애 낳는 날에도 내가 운전해서 산부인과에 갔다.
두 딸을 키우는 동안에도 학원통학차량 대신에 손수 내가 몇 번씩이고 들락날락하며 아이들을 실어날랐었다.
나는 운전하는 걸 참 좋아한다.
일본에 와서 111일 만에 운전을 했다.
1996년 6월 6일, 첫 운전 이후 최장기 운전금지기간인 듯하다.
지난 9월 말 긴긴 기다림 끝에 운전면허를 변경해놓고 나서 호시탐탐 운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타임즈카셰어링에 회원가입을 하고 회원카드도 받아놨다.
집 주변의 타임즈카 주차장도 모두 파악해 놨다.
유튜브로 일본의 신호체계와 운전규칙 등도 미리 봤다.
드디어 어제 일요일, 예약해 놓은 경차를 타고 일본에서 첫 드라이브를 했다.
집에서 47km 정도 떨어진 시코츠국립공원의 시코츠호수에 다녀왔다.
차를 가진다는 건, 운전을 한다는 건 단순히 이동할 때 기동력을 갖는다는 의미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자유로웠다.
혼자 살면서 느끼는 자유와는 또 다른 느낌의 자유.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고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산은 예뻤고 바다처럼 넓은 호수는 잔잔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운전을 즐기느라 멋진 풍경을 눈에만 담고 카메라에 담을 생각도 못 했다.
호숫가에 가만히 앉아서 한참 물멍 산멍만 하다가 돌아왔다.
우리나라와 좌우가 바뀐 일본의 운전은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27년간 몸에 배어버린 습관은 머리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오히려 신호를 보거나 좌회전 우회전할 때는 바짝 신경 써서 그런지 괜찮았는데 몸이 기억하는 실수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차에 탈 때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찾느라 아무것도 없는 왼쪽 어깨 근처 공간을 휘적이고, 깜빡이를 켠다는 게 그만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실수를 몇 번 했다.
모두 한국사람들이 일본에서 운전할 때 제일 많이 하는 실수라고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가능한 한 이곳저곳 많이 다녀볼 예정이다.
시간의 자유와 함께 공간의 자유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