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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Oct 19. 2019

18. 시부모님은 손님이다

동거 8주 만에 우울증이 왔다


BC주 델타지역에 있는 새보호구역 Reifel Bird Sanctuary. 시베리아 철새들의 안식처였던 지역을, Reifel 이란 농장주가 1970년대 나라에 기부했다.

    외국에 나와 있으면, 시댁이나 친정 식구들이 최소 1회 이상은 방문하기 마련이다. 한국을 떠난지 1년이 넘었던 나는 외로웠고, 가족이 그리웠다. 카카오톡 전화로 시부모님에게도 친정부모님에게도 '안 하던' 사랑스러운 문자, 전화, 사진 보내기를 줄기차게 했다. 이 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를 반겨주는 내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래서 "최대한 오래 머무시라" "제가 일 나간 사이에, 아이들 하교도 도와주시라"며 오래 머물고 싶어했던 시부모님을 오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시부모님이 두 달 이상을 머물기로 할 때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10여개월간 캐나다에서 '전업주부' 역할을 해주던 남편이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남편이 없지만, 내가 캐나다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을 많이 줄인 상태였기 때문에 시부모님 관광을 시켜드리며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서 오시라"며 기쁜 마음으로 이불 빨래를 해댔고, 부모님 해드릴 고기와 과일, 채소로 냉장고와 선반을 가득 채워놓았다. 우리 사이는 약간의 불평과 불편함은 있었지만, 12년간 무탈했었다. 명절에는 하루 정도만 머물면 됐고, 가끔씩 여행을 모시고 갔었다. 부모님이 다니시는 헬스장에서 나는 '착한 며느리'였다.


    6주 동안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완벽한 가이드였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의 관광지 곳곳을 검색해, 운전을 하고 모시고 다녔다. 휘슬러, 서리, 델타, 화이트락, 멀리 내륙 공원까지. 사장님께 말씀드려 "쉬는 날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시부모님 구경 시켜드리도록 토요일 근무 바꿔도 될까요"라고 부탁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쁨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싸우고 있다.


    시부모님은 캐나다의 매력에, 그리고 '개인관광'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여행을 자주 갔지만, 해외 패키지 관광이란 것이 시차적응도 안 된 관광객들을 버스에 실어서, 이리저리 급하게 관광시키는 시스템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서는 가만히 누워 있으면, 아침에 조식을 차려준다. 아이들 학교에 등교시키고, 서둘러 며느리는 차를 운전해 관광지로 모셔다 드리고 설명했다. 점심을 사드리거나, 집에서 간단한 간식을 챙겨갔다. 앉아만 있으면 모든 것은 며느리가 다 해줬다. 영어통역, 운전, 끼니해결까지. 두 분은 너무 행복해했다.


'맥도널드' 음료수 사태

    

    내 몸의 피로가 가중되면서 일이 틀어졌다.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부모님을 다시 모시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나는 일터로. 사람이기에 피로가 쌓였다. 그러나 사실 '하면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간단한 메뉴들로 구성된 식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요일, 아이들도 학교를 안 가고, 나도 늦게 출근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몸이 아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뒤척뒤척하다가 힘들게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3일마다 채워놔도 다섯 식구가 함께 먹으니 빨리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계란 후라이 하나 할 수는 없어서, 차를 몰고 슈퍼로 향했다. 이것저것 장보다보니 시간이 훌쩍 1시간 흘렀다. "아, 어머니가 없는 반찬에 식탁 차리겠구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아이들만 거실에 있었다. 인기척이 전혀 나지 앉는 부엌. 이미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을 넘긴 상태였다.


"할머니 안 일어나셨니?"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보시고 노래 들으시던데요."


    딸 아이의 말에 갑자기 화가 솟구쳐 올랐다. 일 나가는 며느리 몸 축나는건 눈에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렇게 착하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여기서는 누워만 있으니 편한 '천국'이 펼쳐졌구나. 원래부터 아무일도 안했던 시아버지보다, 며느리 앞에서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


    잘 하니까, 그게 당연하게 되버렸다. 내 잘못이었다. 다른 며느리들을 보며, 내 마음 속으로 흉보낸 때가 많았다. 친척 중에도 "시부모님 얼굴 보기 싫다"며 명절, 성묘 때 일절 안 오는 분이 있었다. "참 못됐다!" 나는 속으로 욕했다. 마치 나는 고귀한 도덕심을 가진 것처럼. "90세 시어머니 있는 방안만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다"며 아들과 함께 시댁 발길을 끊은 친척 아저씨 내외를 보면서 "며느리가 너무 이기적이다"며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내게는 친절한 사람들을 속으로는 평가했다.


    한 번 나쁘게 보기 시작하니, 7주째부터는 내 마음 속의 미움을 나도 어쩌지 못했다. 맥도널드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있는 아이들과 시부모님 앞에 햄버거 세트를 대령했다. 케찹을 눌러서 담아왔다. 맥도널드는 음료수 컵만 4개 주었다. 각자 바로 앞 음료수 코너에서 따라 오는 시스템이었다. "이거 원하는 음료수로 가져 오시면 돼요." 내 설명에 시부모님은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콜라와 사이다를 따라왔다. 시부모님은 햄버거를 한참 드셨다. 평소에는 내가 알아서 음료수 따라오고, 남은 음식 잔반 처리도 내 담당이었다. 나는 기꺼이 기쁘게 했었다. 그러나 이젠 하기가 싫었다.


    "당신 컵에는 뭐 들었어?"


    한참 햄버거를 씹던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순수한 질문의 의도가 아니었다. '내 꺼는 비워져 있는데 떠오라'는 암묵적인 말투였다. 가부장적인 시아버지(우리 시대의 대부분 아버지들이 그랬듯이)의 수발은 지금까지 항상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 온 뒤로, 시어머니는 그 역할을 내게 넘기려고 했다. 시어머니는 침묵했다. 평소라면 내 엉덩이가 들썩 하며 가져다 드렸을 것이다. 싹싹한 태도와 함께.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침묵했다.


    할 수 없이 내 딸이 "제가 갖다 드릴께요"라고 하며 일어났다. 참 싫었다. 이 역할은 며느리가 하지 않으면, 내 딸이 수발을 들어야 끝나는구나. 1980년대 우리 친정엄마가 안 했으면 내가 친할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듯이. 시어머니는 손녀딸이 가는 것은 탐탁치 않았는지, 함께 일어나서 두 통을 떠오셨다.


"네가 필요하면 우리한테 말해라"


    그 날, 맥도널드 이후로 내 맘의 정이 떨어졌다. 내 호의가, 부모님을 잘 모시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식사를 차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그냥 '당연한' 거구나. 그러고 나니, 습관적으로 하시는 '며느리 칭찬'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말이나 소에 당근 하나 주면서 "내가 이렇게 칭찬해주니까, 너는 더 신나서 나를 봉양하겠지?"라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은 분노로 가득차서, 더 이상 내 마음을 나도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밤에는 시부모님이 하지도 않는 말들이 내 머리를 빙빙 떠돌기 시작했다. 아주 퀘퀘묵은 10년 전 서운함까지 밀려들어왔다. 내가 그 때 그렇게 큰 애 봐달라며, 토요일 근무 가야 한다고 할 때는, "우리 춘천 놀러가야 한다"며 야박하게 거절하더니. 혹시라도 애들 자주 봐달라고 할까봐, 기를 쓰고 거부하더니. 이제는 나중에 제삿상 올려줄 애들이라고, 갑자기 손자 손녀 찾는구나.


    시부모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친절한 우리 시부모님을 보면서 "시부모님이 참 좋네요"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냥 그저 며느리가 있기에, 외국이기에. 부탁해야 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저 편함에 점점 길들여져 가는 것일 뿐. 한 번 가본 곳은 싫다고 하셨다. 다운타운이나 근처 가는 곳은 본인의 힘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먼 곳' '안 가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며느리도 할 이야기 하라"고 한다. 아예 가지 말라고도 한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얼굴이 굳어지고 분위기가 민망해진다.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면, 며느리는 '가정의 행복을 깨는' 사람이 된다. 내가 인내해야, 부모님이 행복해진다.


델타지역의 Reifel Bird Sanctuary. 새들이 나무에 일렬로 서 있다.

감정노동까지 바라지는 말자


    너무 끌고 다니는게 당신 마음이 불편했었을까. 일 마치고 돌아오니 "너 피곤한데 안 가는게 낫지 않겠니?" "가지 않는게 좋겠다"고 시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의중을 나는 알고 있다. 평소처럼 며느리가 환한 얼굴로 "무슨 소리세요. 같이 가요. 옷 입고 나오세요"라는 말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때마침 아들이 내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느라, 대화가 끊겼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아버지는 내 옆에 계속 서계셨다. 내 친절한 대답을 듣고 난 뒤에, 편하게 옷 입고 내려오려는 것 같았다. 아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시아버지는 한참 기다리다 화가 난 얼굴로 올라가셨다. 난 그 의중을 안다. "해달라"라고 하지 않아도, 며느리가 그 의중을 파악해서 '마음 편하게' 해드려야 했었을 것이다. 그 착한 역할을 난 7주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시아버지를 막을 능력이 없는 시어머니에게, 내가 말했다. "아버님한테 어디 가고 싶으신지 여쭤봐주세요." 그 불편함을 참기가 어려웠다.


  조금 후, 지도를 갖고 내려온 시어머니는, 밴쿠버 북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며느리에게 미안하다는 내색을 하고 싶으셨는지, 시어머니는 툴툴 거리며 뒤에서 작게 이야기했다. "아이고, 저 양반은 꼭 자꾸 먼 데로만 다니자고 해. 너 일 다녀서 피곤한데. 여자들 마음을 남자는 몰라." 이제는 더 이상, 시어머니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왜, 내가 내 아이들과 배우자 이외에.. 시부모님의 문제까지 다 책임져야 하지?


    운전을 하고 가면서 말씀 드렸다. "저 한국과는 다르게 손에 익지 않는 일하면서 힘들더라고요. 허리도 아프고요." 시부모님은 대답이 없었다. 한참 침묵하던 시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해. 나는 네가 약 먹는 걸 몰랐지. 그러면 집으로 가던가."


    나는 1982년 김지영도 아닌, 1979년생이다. 도덕심과, 효사상과 유교사상에 아직까지 절어있는. 개인차는 있겠지만, 안 하면 마음 불편함이 남아있는.. 그게 괴로워 내가 먼저 접고 들어가는 괴상한 성격이다. 시원하게 사이다처럼 따지지도 못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은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사이니까. 배우자는 '자신의 부모'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애매한 입장이 되버린다.


    7주를 잘 했는데, 5일동안 내 마음 속 미움과 괴로움으로 병색이 더 짙어갔다. 이제, 내 안의 도덕심을 버리고 그냥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손님'으로 생각하자고.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왜 가족인 나에게, 아들의 배우자인 내게 자꾸 많은 걸 요구할까.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저렇게 누워서 밥상 받아야지만 목구멍에 넘어가나"라고 억울함이 생긴다.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기. 손님이 먼저 요구하지 않는데 내가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기.. 그래야 우리 관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멀리 떨어져야 오래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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