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지 않은 어린이집생활 01] 어린이집이라는 완벽한 시나리오
육아가 지칠 때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상상을 했다. 아침 9시, 아이를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오는 길, 머리도 안감고 얼굴도 푸석하면 어때. 이제 나만의 시간이야! 아침 해가 잘 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몇권씩 쌓아두고 뒤적거려야지. 음악도 들어야지. 소박한 밥상을 차려 천천히 먹어야지. 미뤄두기만 했던 대학원 진학을 할까, 쓰고 싶은 주제의 글을 집중해서 써볼까, 상상하면 할수록 스케일은 커졌고 나는 설렜다.
어린이집은 육아에 지친 내가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아이의 두돌이 다가오며 어린이집에 보낼 상상을 구체화할수록 상상은 걱정으로 변해갔다. 때때로 뉴스를 장식하는 어린이집 사고, 어린이집 교사의 낮은 처우와 거기서 비롯될 낮은 직업적 자존감, 분절화되고 인지교육에 편향된 교육과정, 부실한 식단... 그런 현실 속으로 아이를 밀어넣을 생각을 하니 두려워졌다.
내가 생각한 조건은 단순했다. ‘바깥놀이를 매일 충분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기 전, 자연주의 출산 관련 카페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아이를 맞이할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 갑작스러운 조산으로 자연주의 출산은 하지 못했지만, 자연주의 출산 카페를 들락거리며 발견한 사실.
자연주의 출산을 한 엄마들의 독특한 흐름이 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생태적 환경과 유기농 먹거리를 선호하고, 두세돌이 지나면 발도르프어린이집이나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보내며, 초등 입학 시기에는 대안학교나 혁신학교를 고민하는. 모두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그래.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어떨까?’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인지교육을 하지 않는 대신, 매일 산으로 들로 나간다. 매일 바짓단이 까매질 때까지 뛰노는 아이라니,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그러나 망설여지는 것들. 부모의 금전적 부담은 물론 시간적 부담이 크다. 어린이집 청소에 소위원회 활동에 방모임에 일일교사에 김장까지. 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시간적 부담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남편은 그간 작은 교회, 시민단체, 시골 혁신학교 등 크고 작은 공동체를 경험해왔다. 사람과 지지고 볶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조금은 안다. 부모가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할지, 얼마나 많은 말을 들으며 가슴이 벅찼다가 진절머리 났다가를 반복할 것인지.
이런 나는 도무지 공동체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좌절하려다 질문을 바꿔보았다. 신뢰할만한 전문가에게 아이를 맡기는 방법도 있잖아?
‘그렇다면 발도르프어린이집은?’
발도르프어린이집 공간은 아름다웠다. 원목 가구와 따뜻한 색감의 벽지, 나무 토막과 솔방울, 털실로 만든 끈이 가지런히 정리된 수납장,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식탁... 발도르프 아이들은 쓰임새가 제한된 플라스틱 장난감 대신 상상의 여지가 큰 자연물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게다가 매일 숲으로 산책을 간다.
그러나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 알아볼수록, 문외한인 내게는 유사종교처럼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발도르프 교육의 철학적 기초인 ‘인지학’이 다루는 내용이 그랬고, 발도르프 이론을 적용하는 데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태도가 그랬다. 20세기 초에 창시된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이 변화 없이 전수되고, 2021년의 한국 현실에 맞춰 비판적 적용이나 창조적 변형을 시도한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발도르프 육아 관련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혼나는 기분이었다. “마트나 백화점은 너무 크고 자극적이라 안돼, 문화센터는 음악이 시끄러워서 안돼, 카페는 공기가 나쁘니 안돼.” 자극적인 환경을 지양하고 아이의 보호막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일 게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리스트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옴싹달싹하지 못하는 엄마의 괴로움도, 죄책감도 커진다. 서울 한복판에서 발도르프를 실천하는 일은 이렇게 어려워야만 하나?
육아의 나날이 쌓일수록,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투입 대비 성과를 측정할 수도 없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전속력을 내어 일에 몰두할 수 없는, 노동자로서 가장 큰 핸디캡을 가진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아이를 키우며 다른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배워간다. 아이와 산책하며 낙엽과 나뭇가지를 줍는 무용한 시간을 통해 나 역시 조금 변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의식이 육아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나 모성애에 대한 신격화로 이어지는 건 타당할까. 육아가 끊임없이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주어진 환경을 검열하고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그렇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면.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에 자신의 에너지 모두를 써야 한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엄마니까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면.
‘너무 어렵게 가지 말자.’
결국 내가 세운 건 이 소박한 원칙이었다. 엄마의 정체성이 나를 압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적절한 거리두기, 육아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는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믿음, 내 아이만이 아닌 내 아이가 속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다짐 같은 것.
그 마음으로 집 근처 일반어린이집에 입소 신청을 했다. 부족해 보이는 환경일지라도 아이는 또래로부터 배울 것이고, 나는 아이와 떨어진 시간으로부터 배울 것이라 믿으며.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 127호(2020년 1-2월호)와 단행본 <부모되기, 사람되기> (고병헌 외, 민들레)에 실었던 글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