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상처에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자존감 신화
인터넷에 떠도는 ‘진상 학부모 체크리스트’를 보았다. '내가 손가락질했던 진상 부모가 알고 보니 나였다고?'라는 문구 밑에, 자신이 진상 학부모인지 체크할 수 있는 다양한 예시가 있었다.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 이후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이 문제의 핵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이 체크리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몬스터 페어런츠’(monster parents, 일본에서 진상 학부모를 일컫는 말), ‘내 새끼 지상주의’(소설가 김훈)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눈에 띈다. ‘우리 애는 예민하지만 친절하게 말하면 다 알아듣는다’, ‘우리 애는 순해서 다른 애들한테 치일까봐 걱정이다’, ‘우리 애가 잘못했지만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체크리스트에서 자녀가 상처받을 것에 대한 부모의 공포를 본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왜 이렇게 아이가 받을 상처에 전전긍긍하게 된 걸까?
우리 시대에 자존감은 또 하나의 종교다. 수많은 문제들은 자존감이라는 어휘를 경유해 도착한다. 교사의 자존감이 떨어진 것은 교실 전체의 문제이고, 장애인 취업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높이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복지다. 발기부전이나 배우자의 외도는 자존감에 큰 타격을 주고, 치아교정과 틱 장애 치료는 성장기 자녀의 자존감을 위해 꼭 필요하며, 학교와 도서관에서는 아동의 자존감을 함양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다. 오늘날 자존감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 느낌은 유동적인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끝없는 숙제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육아에 있어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자. <금쪽 상담소> 가수 선예편, 선예가 10살 딸의 안검하수 수술을 고민하자 오은영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이는 신체 자아상이 형성되는 중요한 나이에요. 예쁘냐 잘생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신체에 얼마나 편안하고 자긍심을 느끼느냐 하는 거에요. 사람과 사람을 대할 때 ‘너 눈이 왜 그래?’ 이렇게 대하게 된다면 아이가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많이 준단 말이에요. (...) 그런 면에서 어린 아이에게 가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모든 인간은 고유하므로, 성장 과정에서 남들과 다른 점을 인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과 이로 인한 혼란을 긍정적 자아상의 정립 실패, 자존감의 하락 등으로 설명할 때, 두려움은 증폭된다.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아이를 전학 보내야 할 때, 다른 아이들처럼 생일 파티를 해주지 못했을 때, 아이가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할 때, 야근이 잦아 아이의 얼굴을 보기 힘들 때, 엄마의 귓가에 맴도는 말들도 이것이다. ‘아이의 긍정적 자아상, 자존감, 정서적 안정….’ 아이의 성적에서 자유로운 엄마라도 여기서까지 쿨하기는 힘들다.
학부모들이 자녀가 받을 감정적 상처에 집착하게 된 것에는 자녀의 자존감과 긍정적 자아상을 강조하는 이 시대의 육아 문화가 있다. 오은영 박사 이전에는 최성애 박사‧조벽 교수의 '감정코칭'이 유행했고, '비폭력 대화'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소비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몇십 년 전부터 교육 현장에서 아동의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한 방안이 연구‧실행되어왔다. 이러한 정책이 학교의 방향감각 상실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가 말하듯 "자아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개인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특징으로 해석되는 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좋게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계획들이 넘쳐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프랭크 푸레디, <치료요법문화>, 박형신‧박형진 옮김, 한울 아카데미, 327쪽)
‘자존감 신화’를 둘러싼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걷어낸 채 ‘진상 학부모’를 손가락질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한 젊은 교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사회적 논의가, 이 시대의 육아를 어렵고 복잡하게 꼬아버린 것들에 대한 비판과 성찰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