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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Sep 10. 2023

“너희 집 차는 왜 이렇게 작아?”

크레이지 모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너희 집 차는 왜 이렇게 작아?”


아이의 어린이집은 셔틀을 운행하지 않는다. 부모들이 자신의 차로 아이를 실어 나르는 일이 반복되며, 어느덧 아이들은 누구네 집 차가 무슨 모양과 색깔인지 정확히 구분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우리 차가 오면 이렇게 말했다. 다른 버전으로는, “우리 집 차가 너희 집 차보다 크지?”가 있다. 물론 아이들은 차의 계급도에 대한 지식이 없고, 그저 우리 차가 자기 차에 비해 작고 아담해보인다는 걸 표현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현을 계기로 내게 뭔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집만 모닝이네? 다른 집들은 다 좋은 차 같네? 남들이 우리를 가난한 사람으로 볼까?’ 모닝을 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스물스물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식 은색 모닝이 우리 집으로 온 건 2014년이다. 당시 남편은 한 지방 소도시로 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제 우리도 차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 말에 남편은 중고차 시장에서 오백만원을 주고 이 차를 데려 왔다. 나는 차는 그랜저, 소나타, 모닝밖에 몰랐고 남편은 나보다 더 심했다. ‘차는 굴러가기만 하면 되고, 비싸고 좋은 차는 막 굴리기 불편할 것이다!’ 그것이 천오백만원의 예산을 가지고 은색 모닝을 끌고 온 남편의 속내였고, 그에 반발하기에는 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차가 생긴 우리는 우리가 살게 된 도시 ‘강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강릉이는 우리 집 패밀리카다. 


어린이집 아이들의 말을 계기로 모닝을 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싹틀 무렵, 18년을 탄 엄마의 차가 고장 났다. 엄마의 차를 같이 보러 다니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도로에 늘 보이는 이 차가 4천이나 한다고? 풀옵션으로 하면 5천이라고? 00는 7천짜리 차를 타고 다녔다고?’ 도로가 거대한 자동차 전시장으로, 지인들의 차가 그들의 소득수준과 자산을 보여주는 거울로 보이는 ‘개안’의 시간이었다. 모닝은 안전하지 않고 장거리 운전에 불편하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나도 차를 계약했다. (이 계약의 주체가 남편과 나를 포함한 ‘우리’가 아닌 것은, 남편은 새 차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강릉이가 좋은데? 그래도 네가 사고 싶으면 사.”) 출고 대란과 겹쳐 계약한 차는 일 년이 지나도 출고되지 않았다. 드글드글하던 차 욕망이 조금씩 소진되고 목돈이 필요한 이사가 다음 달로 다가왔을 때, 차가 출고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계약을 취소했다. 


출처: 다나와 https://auto.danawa.com/news/?Work=detail&no=5402872&NewsGroup=M


장거리를 거의 다니지 않고 골목골목 운전할 일이 많은 우리에게 사실 모닝은 좋은 차다. 길이 좁은 데다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고 곳곳에 차가 세워져 있는 어린이집 근처 골목길을 모닝은 여유있게 빠져나간다. 기름값도 별로 안들고 주차비도 반값이다. 그렇다면 모닝을 좀더 타는 대신 혼자만의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크레이지 모닝 프로젝트! 모닝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자각하고도 그 계급을 지워버리지 않은 채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실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3년 전 운전을 시작한 후 한번도 경적을 울려본 적이 없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으니 천천히, 얌전히, 안전 운전하자는 생각이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닝을 타는 여성 운전자(우리 차는 전혀 선팅이 되어있지 않다)로서 나는 내가 도로 위의 소수자라는 걸 안다. 그래서 누군가 도로 위의 룰을 어겼을 때에도, 항의하기보다는 ‘얌전한 모닝’으로서 불의와 불편을 참았던 건 아닐까? 누군가 급하게 끼어들 때, 비매너 운전을 할 때, 무조건 양보해주기보다는 정당한 분노를 표현해보면 어떨까? 으르렁거리는 치와와처럼 참지 않는 모닝이 되어보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프로젝트는 얼마 가지 못했다. 아이의 어린이집에 가는 길에는 차 한 대만 겨우 진입 가능한 양방통행로가 있다. 도대체 왜 일방통행로가 아닌지 이해할 수 없는 이 길에는 왼쪽에서 오는 차가 우선이라는 암묵적 룰이 있다. 그 길을 왼쪽에서 지나는데, 오른쪽에서 오는 차가 나를 보고도 후진을 하지 않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라? 여기 룰 몰라? 내가 먼저라고! 나 무시해?’ 나는 기세 좋게 경적을 울려대며 전진했다. 그때 맞은 편 차에서 한 중년 여성이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뒤에서 차가 오고 있어서 지금 후진할 수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상대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자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후진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고 사납게 경적만 울려대다니. 부끄러웠다. 나는 참지 않는 모닝으로 도로 위를 누빌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지 않겠다고 해서 거칠게 누군가에게 경적을 울려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경적을 울릴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강릉이와 같은 은색 경차를 ‘은경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동호회 사진이 화제다. 이 사진들 밑에서 다양한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었는데, 중형차를 탔을 때보다 경차를 탔을 때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빈도가 현저히 잦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이었다. 경차 뒤에서 자꾸 경적을 울리게 되는 건, 그들 중 높은 비율로 초보 운전자가 많아 속도를 내지 못하거나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내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좁은 주차장을 차지하고 걸핏하면 흰색 주차선을 넘어 불편함을 주는 건 대형차다. 대형차가 흰색 주차선을 넘어가도, 경차는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포용해준다. 한정된 주차 공간에서 조금 더 많은 차가 편안하게 주차를 할 수 있다면 그건 경차 덕분이다.


출처 : https://www.fmkorea.com/best/5872870217


모닝을 탄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명한 차 계급도에서 한참 밑에 내려다보아야 보이는 존재, 선망받기보다는(이 주위의 선망을 요즘 사람들은 ‘하차감’이라는 세 글자로 표현한다) 무시당하기 좋은 존재, 그래서 약간, 아주 약간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불편의 흔적을 재빨리 지워버리지않고 더 관찰하면서, 즐거움으로 전유하면서 지내보려 한다. 우리집 패밀리카는 여전히 은색 모닝, 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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