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대 캠퍼스의 대학 생활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끙끙거리는 와중에 두서없는 꿈을 꾸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다. 총엠티, 동기엠티, 개강총회 같은 낯선 행사가 가득했고 선배들은 술을 마셔라 외쳐댔고 그 와중에 맘에 안드는 놈이 내가 좋다고 공개적으로 고백을 해댔다. 악몽이었다.
이천년대 초반, 스무 살의 나는 흡족하지 않은 성적표를 들고 여대에 갔다. 서울 끝에서 끝, 등하교는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대학생이었다. 화장을 하고 치마을 입고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연애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 말고 뭐를 더 할 수 있지? 동기들은 근처 명문대생과의 미팅과 소개팅에 열을 올렸지만, 학교 안은 신기하리만치 고요했고 학교 밖은 그 흔한 술집도 없었다. 친구들은 입시에 실패했다는 열패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재수나 편입 같은 단어들을 자주 입에 올렸다. 어영부영 일 년을 지내는 사이, 내가 가고 싶었던 과가 갑자기 없어졌다. 시위나 성명서, 대자보 같은 것들 없이 학교는 여전히 고요했고, 나는 침묵으로 가득찬 학교가 무서워졌다. 1학년을 마치고 재수학원으로 갔다.
스물두 살, 나는 이전보다 많이 오른 성적표를 들고 남녀공학 대학교에 갔다. 내가 입학한 과는 남성과 여성이 5:5의 비율이었다. 여중-여고-여대를 다니다 남녀공학 대학교에 갔으니, 이전 대학에서는 누려보지 못했던 ‘대학문화’라는 걸 누려보고 싶었다. 개강하자마자 그 대학문화라는 얼굴 없는 것들이 도적 떼처럼 달려들었다. 오티를 가지 않았음에도,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이 연락을 해왔다. 3월 한 달은 새내기가 자기 돈 내고 밥 사먹으면 안된다며. 매일 매일 새로운 동기와 선배의 조합으로 점심 식사가 이어졌다. 일주일 두세 번 이상은 저녁 마다 개강총회, 학회 뒤풀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갖가지 이름을 딴 술자리가 이어졌다. 어느 술자리에서 몇 명이서 소주 몇병을 마셨고 누가 가장 늦게까지 남았고 누가 엄청난 주사를 부렸는지가 다음 날이면 영웅담처럼 떠다녔다. 그렇게 만나고도 밤마다 네이트온 메신저가 불이 났다. 밤마다 꽃피우는 이야기들이란,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더라는 거였다. 3월 한 달동안 사랑의 짝대기가 무수히 화살을 쏘아댔고, 그 와중에 몇 개의 짝대기가 서로 이어졌다.
첫 한 달간, 모두들 반쯤 넋이 나갔다. 낯선 선배와 행사와 문화와 질서 사이로 급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리버리한 십대는 완전히 지우도록, 어느 대학 어느 학과 소속 누구라는 정체성만이 남도록,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질문할 새도 없었지만, 가장 먼저 교육받았던 것은 모두가 이런 대학 문화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자부심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의 운동권 문화, 술자리, 선후배 간의 끈끈함, 함께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경험 같은 것들이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상위권 대학 구성원 특유의 자신만만함에 과별 모집을 한다는 특수성이 더해져 과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던 곳. 선배들은 오랫동안 이어진 역사와 문화를 잘 지켜야 한다고, 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 문화는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를 기묘하게 소외시키고 있었다. (당시 나는 상명하복의 선후배 관계가 나처럼 나이 많은 신입생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느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술자리에 열을 올렸을까. 술자리에서 무얼 했더라? 술을 마셨고, 또 마셨고, 술을 마시기 위해 369 게임이나 아이엠그라운드를 했고,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진실 게임의 형식으로 누구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지 고백을 했고, 최후의 생존자들이 술에 떡이 된 이들을 질질 끌어 자신의 자취방에 뉘었다. 이 술자리가 거듭될수록, 술자리에서의 권력이 선명해졌다. 술자리에서 인기 있는 사람은 술을 빼지 않고 잘 마시는 사람, 분위기를 잘 띄우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남자’. 인사불성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당연하게도 남자다. 여자가 그렇게 마셔댔다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각종 위험 상황을 마주치는 건 물론이고 부모님께 죽이 되도록 혼날 수도 있으니까. 분위기를 잘 띄우는 것도 남자였다. 남자들은 주로 여자 후배들을 짖궂게 놀리는 것으로 분위기를 띄웠고, 그 당시 그들이 나를 놀리던 별명은 (나이가 많다고) ‘이모’였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분위기를 띄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과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술자리에서 술 잘 마시는 남자와 분위기 잘 띄우는 남자가 선배들의 사랑을 받고 그들만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동안, 여자들은... 고백을 받았다. 여고에서도 예쁜 여자들은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남녀공학 대학교에서 예쁜 여자들이 얻는 인기에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남자 선배들에게 밥과 술을 얻어먹는 횟수, 누구에게 고백을 받았다더라 하는 소문 같은 것으로 이성으로부터의 인기가 적나라하게 카운트되었다. 남자 동기들은 여자들을 짖궂게 놀리고, 술을 같이 먹고, 집에 데려다주고, 조용하게 혹은 떠들썩하게 고백을 하고, 고백 후 차인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반복했다. 여자 동기들은 화장을 시작하고 고등학생 시절의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샀다.
논스톱 시리즈를 보고 자란 나는, 빛나는 청춘들이 우정을 쌓고 연애를 하고 꿈을 좇아 나아가는 대학 시절을 꿈꾸었다. 나의 대학 시절에도 이런 드라마가 녹아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열심히 놀았으니까. 하지만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남자들의 시선과 평판에 좌지우지되었던 그 때, 나는 그들의 선후배이자 친구이면서도 ‘타자’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을 20년이나 지나, 꿈에서 맞닥뜨린 신입생 시절의 나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남녀공학 대학교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해 혼돈에 빠져 있었다. 나의 혼돈을 살피는 대신, 남성들의 고백의 대상이 되기 위해 그들의 시선을 부단히 살피고 그 시선으로 내 외모와 옷차림과 성격과 분위기, 모든 것을 훑고 있었다. 꿈에서 깬 나는 무거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