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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Jun 06. 2022

며느리의 냉장고를 지켜주세요

주부들의 성역 냉장고

  주부들에게 냉장고는 성역이다. 남이 함부로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특별하게 부지런하지 못하고 정리에 영 소질이 없는 나 같은 주부에게는 더 많이 적용된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 나도 냉장고 정리해야 하는데.', '냉동실 한 칸은 거의 음쓰통이야.', '냉동실 음식은 내가 꺼내야 돼.' 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저 깊은 구석 어딘가에서 상했을 반찬과 물러져있을 채소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 싶다.


  재료를 살 때는 이 재료로 해먹을 온갖 음식을 상상하면서 담는다. 마트를 한 바퀴만 돌아도 머릿속에 9첩 반상이 떠다닌다. 버섯을 보면서 생각한다. '버섯전골을 해 먹을까? 그럼 소불고기도 좀 사야겠다. 버섯이 여러 종류면 더 맛있겠는데...... 모둠 버섯으로 사면되지! 뭐 꼭 전골 못해먹으면 된장찌개에 넣어먹으면 되니까. 어? 그럼 두부를 좀 살까?'이런 식이다. 또 콩나물을 보면서 생각한다. '콩나물밥 해서 양념장에 비벼먹을까? 콩나물국 끓여도 되고, 삶아서 나물해도 되겠다. 어? 이게 더 양이 많은데? 10g당 단가가...... 역시 양 많은 게 더 싸네!' 이것저것 카트에 담다 보면 할 수 있는 요리는 넘고처진다. '원 플러스 원' 말해 뭐해. 'CJ 상품 3만 원 이상 구매 시 상품권 증정'은 또 말해 뭐해. 결국 다 못해먹어서 문제지.


  친구가 와서 같이 점심을 해 먹는데 나를 도와준다고 냉장고를 벌컥 연다. 흡! 숨이 약간 멈추고 친구의 눈치를 살핀다. '아, 정리 안 하고 산다고 욕하는 건 아니겠지.' 집에 손님이라도 온다고 하면 혹시나 손님이 음료를 찾아 냉장고를 열어볼까 급하게 보이는 곳을 치우기도 한다. 정말이지 살림에 자신이 없다. 그럼 치우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기특하게도 가끔 어떤 날은 냉장고 청소를 해야지 큰마음을 먹기도 한다. 이럴 때는 보통 한 칸 정도 치우고 나면 지친다. 와우! 한 칸만 치웠는데도 한여름 계곡에서 등목한 느낌이다. 다음 칸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의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살림 병인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혼자서 발을 저리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시부모님 집과 우리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언제 누가 집에 들어와도 항상 정리 정돈된 깨끗한 집이면 좋으련만 나는 손님이 와야 청소다운 청소를 하는 저 레벨의 주부이므로 늘 불시검문을 두려워했다. 와중에 시부모님께 욕실과 냉장고만큼은 지켜내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 있었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감사하게도 어머니 아버지는 함께 산지 1년이 되도록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결혼 다음 해 긴 장마가 끝나고 볕 좋은 날 시아버지가 우리 집 창문을 열어주려고 딱 한 번 들어오신 적이 있다.)


  반찬이나 가지고 갈 것이 있으면 대부분 시부모님 집으로 나나 남편을 부르셨고, 우리가 부재중일 때는 중문만 살짝 열어 바닥에 두셨다. 어느 날 퇴근하고 회식자리에 갔을 때였다. "수람아, 퇴근 언제 하니?" 평소에 전화를 잘 안 하시는 어머니인데 그날따라 내 퇴근 시간을 물으시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회식 중인데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었다.


"김치 좀 꺼내려고 하는데 너 언제 들어오나 궁금해서."


어머니 김치냉장고에 자리가 없어서 우리 집 김치 냉장고에 김지 한 통을 넣어놓았는데 그걸 꺼내셔야 했나 보다. "엄마, 김치냉장고 맨 밑에 칸에 있어요. 거기서 꺼내시면 돼요." 했더니 "급한 거 아니야, 너 오면 두 포기만 꺼내다 주렴." 하셨다.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 열댓 걸음만 걸으면 닿는 집이다. 내가 없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내 냉장고를 지켜주셨다. 별 거 아닌 '김치 두 포기'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나의 시어머니.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 중 하나는 며느리의 냉장고를 지켜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그 시골에서 시부모님이랑 함께 사냐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산다고.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의 냉장고를 지켜주는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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