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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May 31. 2022

엄마에게 끓여드린 첫 미역국

  결혼하기 전 29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엄마의 그늘에서 엄마가 한 밥을 맛있게 먹었던 것뿐이었다. 엄마에게 다 비운 밥그릇을 선물하고, 먹고 나서는 "진짜 맛있다. 엄마 밥이 최고야!" 같은 말을 하면 최고의 딸이 되었다. 빨래를 빨래통에 넣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았고, 가끔 옷을 잘 정리하고 나가면 "웬일이야!" 등의 감탄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매일 다른 반찬이 담긴 점심 도시락, 주말마다 새하얗게 빨아진 천 실내화, 늘 좋은 냄새가 났던 베개와 이불, 언제 서랍을 열어도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속옷, 소풍날 아침이면 온 집안에 풍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매끈하게 날이 살아있던 교복의 어깨선까지 어느 것 하나 당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엄마는 없는 살림을 꾸리며 나와 동생 학원을 보냈고, 책장의 전집들도 한 번씩 새로 바꿔주셨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초대하는 생일 파티를 부러워하니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도 사고, 피자헛에서 피자도 시켜 생일 파티도 열어주셨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해주는 모든 것이 당연해서 고마운 줄 모르고 엄마를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기 바빴다.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는 엄마, 벽에 오빠들 포스터를 붙여도 혼내지 않는 엄마, '오빠들이 밥을 먹여주냐', '친구들이 밥을 먹여주냐'같은 잔소리를 하지 않는 엄마. 나는 친구들의 엄마를 부러워하는 철부지였다.


  그런 엄마와 큰 갈등이 있었던 때가 있다. 고2 때 TV에서 눈 큰 소녀가 '처음 만나는 자유'를 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은 '팅'으로 무제한 통화를 하고, '비기'로 알을 주고받았다. 나는 엄마가 핸드폰은 절대 안 된다고 했고, 친구들의 4화음, 16화음 벨소리를 그저 감탄하며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하고 불행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다 얼마 전 엄마가 그때 이야기를 꺼내셨다. 당시 내가 너무나 핸드폰을 원하니까 정말 사주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핸드폰을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면담이 있었는데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으셨다는 거다.


"선생님, 수람이가 핸드폰을 너무 원해요. 사주려고 하는데 맞는 건지 고민이 되네요."

"어머님, 절대 안 됩니다. 수람이는 핸드폰이 있으면 절대 안 되는 학생이에요."

"그래도 아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수람이는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핸드폰이 생기면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거예요. 제 말 듣고 절대 사주지 마세요."


  엄마만큼 나를 잘 알고 있던 담임 선생님 말씀을 듣고 안 사주셨다는 뒷이야기를 20년이 지나 알게 됐다. 당시 엄마에게 원망만 가득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만했다. 안 사주기를 잘하셨다'는 생각이 들기 한다.


  그렇게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기쁨과 보람을 드리며 살다가 '결혼'을 하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구남친과 연애하는 2년 내내 나는 들떠있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서운하다고 했다. 혼수를 준비할 때는 네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았던 아파트를 벗어나 나만의 집을 갖는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나만의 TV라니, 나만의 냉장고라니!' 신나서 이것저것 고르는 나를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 생신이 다가왔다. 달력에 작게 적힌 음력 날짜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생신상 메뉴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머니 생신 전날 불고기와 잡채에 도전했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까지 끓여 세 가지 메뉴를 아침에 갖다 드렸다. 시부모님이 감탄과 칭찬을 해주시니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해냈다는 기쁨과 '이런 것도 챙기는 우리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제대로 '며느라기'였던 시절이었다. 출근해서 달력을 보다가 문득 '올해 우리 엄마 생일이 언제더라.' 하고 찾아보게 됐다. 그리고 '작년 엄마 생일에 내가 뭘 해줬더라'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랬다. 29년 동안 한 번도 엄마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드린 적이 없었다. 29년 간 수만 번의 엄마 밥상을 받아먹으면서 '단 한 번도' 엄마 아빠 생신상을 차려드린 적이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제 그 집 식구다.', '시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말을 골백번 들었던 터라 오늘 시어머니 생신상 잘 차려드렸다고 전화해서 칭찬받으려고 했는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석 달 뒤 엄마 생신날 조퇴를 내고 장을 봐서 친정으로 갔다. 나물 세 가지를 무치고, 소갈비를 재고, 미역국도 끓였다. 시간이 부족했지만 엄마 퇴근 전까지 어찌어찌 완성해놓고 밥까지 안쳐놓고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계속 핸드폰만 쳐다봤다. 얼마 뒤 퇴근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세상에 내 딸이 이렇게 밥을 차렸어!" 하는 엄마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에게 수만 번의 밥상을 받아놓고 겨우 한 끼 갚았을 뿐인데 엄마는 "내 딸 고맙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에이, 뭘." 했지만 목구멍 뒤에 "아니, 엄마 내가 고마워요."를 꾹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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