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L. 대니얼 호크
고등학생 때쯤이었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진 의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잔혹함이었다. 구약성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보면서 평화와 사랑의 상징인 예수님과 연결지점을 찾기 어려웠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과연 같은 분일까? ‘난 예수님을 믿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못 믿겠어’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 이 의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시간은 흘렀다. 그러다 이 책 <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를 발견했다.
책은 성경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이 ‘왜’ 폭력과 전쟁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성경 속 폭력의 요소들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훼손하지 않으며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에도 공감하며 그 이유를 하나님 사역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평화와 사랑이 충만한 곳이었다. 창조 세계의 뒤틀림은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로 삼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의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고, 아들 카인은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다. 이후 인간 세계는 죄와 폭력으로 가득했고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분노를 참지 못해 폭력을 쓰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기 6:6)
책의 저자는 이 성경 구절과 함께, ‘인간의 폭력에 대해 야웨가 최초로 보인 감정은 슬픔이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나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폭력을 관찰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창조 세계와 인간을 사랑하셨고, 동시에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다시 '아브라함'을 인간 파트너를 선택한다. 그의 가정, 그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하신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아담을 지으시고 선택했던 것과 동일한 한계가 존재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폭력적인 사회 체계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한다는 점이다.
권력과 폭력의 매커니즘 안에 있는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명예와 능력을 나타내는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집트 탈출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이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을 선포하기 위해 인간 대리인들(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간 세계의 폭력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폭력은 광야에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 이르는 내러티브 전반에 걸쳐 두 가지 궤도를 따라간다. 첫째 야웨는 신적 보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원수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 둘째 야웨는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권자를 무시하고 다른 신들을 쫓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신다.
안타깝게도 창조 세계의 회복 계획은 인간 파트너들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부하며 인간 왕을 세우더니, 결국 나라도 잃고 포로생활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을 통한 완벽히 다른 전략을 준비하고 계셨다.
군주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왕들의 포학한 계략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주님의 중심축이 외부로 옮겨진 것은 기존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던 실패한 전략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체계 외부에 완전히 자리를 잡음으로써 새롭게 회복하기 위한 사역을 재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폭력적이며 죄로 뒤틀린 인간의 권력 체제를 벗어나기로 결정하셨다. 오히려 가장 비천한 곳에서 연약한 이들을 통해 더러워진 세상을 정화시키려는 전복적인 계획을 세웠다.
예수의 말씀은 보복이라는 폭력의 윤리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이타적인 결단으로 변화된 새로운 통치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뒤틀리고 비정상적인 사회와 대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원시적인 이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구현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인자와 자비를 차별 없이 베푸는 창조주를 닮은 자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비폭력의 기조를 유지하시지만, 하나님의 폭력이 사라진 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과 공의를 세우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신다. 어찌 보면 인간이 올바른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처벌제도를 운영하고,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을 교육하기 위해 벌을 내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책의 저자는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적 논의를 벗어나길 요구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전략을 본다면, 인간의 정치사회 체계와 그 폭력적 요소를 인정하고 그 안에 개입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고(조선의 독립운동/전쟁은 반기독교적인가?), 예수님의 비폭력적 원칙에 기반하여 모든 제도적인 폭력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여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전략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정경은 원칙 있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상반된 관점을 들어보고 하나님이 엉망진창이 된 세상 속에서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함께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공동체를 원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 있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파트너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담과 이스라엘도 실패했지만, 지금의 교회 모델도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더욱 왕성하게 욕망을 쫓아가고 있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제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의 폭력으로도, 사랑으로도 도무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세상을 다시 한번 쓸어버리고 싶으실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만 안 하셨다면!)
공동체의 붕괴, 극단적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 같다. 분노와 보복의 감정이 아니라,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물질적 욕망과 세상의 편안함에 찌든 내가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짙게 드리운 어두움 가운데 갈길을 찾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