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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30. 2019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오늘의 기독교는 무기력하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멸시받고 조롱당한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불의에 맞선 자발적 고난이 아니다. 더러워서, 세상의 오물을 뒤집어쓴 탓에 비난받는다.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지금, 기독교는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기독교가 무기력해진 이유


기독교가 무력화된 이유는 복합적이다. 기독교 내부의 문제뿐 아니라 시대적인 변화가 기독교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주요 원인을 거칠게 정리하면 아래 세 가지를 꼽겠다.

첫째는 기독교의 ‘사유화’ 다. 주류 교회들이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 믿고 ‘내가 천국 가는 것’이 핵심이다. 나의 구원과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배도, 봉사도, 전도도, 구제도 결국엔 ‘내가 복 받은 삶’을 살기 위한 전략과 도구가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 맡기신 세상을 향한 공적인 사명에는 무관심하다. 에덴동산의 청지기 역할을 맡았던 아담과 하와가 사적인 욕망을 쫓아 선악과를 집어 든 모습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공공의 청지기’ 역할에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청지기로서 힘을 기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둘째는 기독교의 ‘세속화’ 다.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복’도 세상의 ‘복’과 다르지 않다.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번영이 복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과 삶의 방향이 다르지 않다. 세상과 똑같이 물질과 권력, 명예를 섬기며 행동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생길 수 있겠는가.

마지막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확산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뢰했던 모더니즘이 그 폭력성으로 인해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진리의 언어들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절대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기독교는 독선적 종교라는 이미지로 외면받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특히, 동성애와 같은 이슈 덕분에 기독교는 ‘혐오의 종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은 이렇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18-20, 새번역)


명령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이웃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우리의 일차 과제다. 세상 속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질 때 성령께서 이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을 배출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기만 했다. 제자훈련은 사실상 실패했다. 신실한 제자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지 못했다. 한국교회가 세상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방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새물결플러스)에서 세계 변혁을 위한 기독교의 실천대안으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을 제시한다. 그는 미국의 주요 기독교 세력들(기독교 우파와 좌파, 신-재세례파)이 가진 신학적 세계관과 정치적 전략을 분석하고 그 한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비판과 대안에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기독교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육신을 모델로 한 ‘신실한 현존’을 통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지금 한국 교회에 충분히 적용할만한 내용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세 가지 실천 방안


나는 그의 ‘신실한 현존의 신학’을 모티브로 삼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이 실천 방안은 서로 중첩되어 있으며 가정과 직장, 교회 등 내가 존재하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리고 그곳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세우기 위한 치열한 삶의 원칙이기도 하다.

첫째는 ‘공공선(公共善)’에 기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며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위해 일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공동체가 번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우선 과제다.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예수님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순종한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모든 인류에게 ‘복’이 되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복’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위치하고 있는 문화 속에 들어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의 일상적 경험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로서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지만 공공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독특함을 유지하라고 명하셨다. 이런 맥락에서 신실함은 그들이 거하는 세상에 축복이 된다는 뜻이었다.
 -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둘째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약속이다. 언약에 기반한 삶은 세상의 가치를 쫓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는 삶이다. 언약적 삶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증거 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언약적 삶은 그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며 사회 정의를 훼손하는 일(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와 무관심) 즉, 언약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심판하셨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선한 변화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마지막은 ‘성육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삶에 직접 찾아온 사건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눈 앞에 증거 된 사건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적 사랑의 증명이기도 하다. ‘성육신적인 삶’이란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삶의 현장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 따로, 신앙생활 따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리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기독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또한 동성애와 같은 이슈에 있어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처럼 존재를 ‘혐오’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 삶에 참여하는 종교가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의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재연(enacted)된다. 모든 경우에 임재와 장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성육신보다 이것이 분명한 경우는 없다. 따라서 말과 세계는 단어들이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오히려 말과 세계는 말의 재연을 통해 하나가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재연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재연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토대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한국 교회에 희망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실은 그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 나라의 포로로 내주셨지만 다시 귀환시키신 것 같이, 한국 교회도 지금은 비참해 보이지만 심판과 회복의 시간을 거쳐 다시금 부흥의 시간이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기다린다. 위에서 실천 방안이라고는 했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의 내용이어서 스스로도 아쉽다. 실천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례들은 앞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쌓아가야 할 과제이다. 비록 내 세대에는 그 열매를 보지 못할지라도 부흥의 씨앗을 뿌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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