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성경 - 마태복음(1)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로 시작한다. 족보는 예수의 혈통과 정통성을 보여준다. 읽는 사람은 지겨울지 모르지만 마태에게는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다.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고 누구의 핏줄인지가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태는 유대교가 예언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임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의 족보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시작해 다윗의 핏줄임을 강조한다. 1장 1절에 그 내용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가 이렇게 정통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의 독자가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1세기 중반, AD 70년~100년 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초대 교회 유대인을 위한 신앙적 권면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 성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줘야만 했다. 마태복음 곳곳에 구약 성경의 예언 구절을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13: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생전 예수의 행적은 크게 2가지다. 병고침과 가르침.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치유 사역 그리고 복음을 가르치는 말씀 사역이다. 치유 사역은 예수가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임을 증거 하며 말씀 사역은 하나님을 믿는 삶,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마태복음에는 이러한 예수의 행적들로 가득하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특히 5장에서는 유명한 ‘산상수훈’이 시작된다. 인상적인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로움의 수준이다. 유대교의 율법과 예수 자신의 가르침을 비교하며 그 차이를 부각한다.
[마5:21-22] 21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형제에게 분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과연 감정을 가진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이 말씀을 들은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성경은 청중들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 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가르침이었지만, 그간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하나님의 권위(이른바 영빨)을 느꼈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따라야 할 최소한의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이 부여한 율법의 정신은 ‘완전함’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닮은 완전한 사랑과 거룩이다. 문자에 얽매어 왜곡되어 버린 율법의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가 오셨다. 마태는 예수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분임을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는 복음 전도자로서 참 성실했다. 복음을 전할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가진 사전 지식과 맥락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것을 다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복음을 듣는 이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수긍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이런 데에 있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혜를 성령께서 부어주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 전도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도, 티슈와 사탕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사람들을 배려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성실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불안과 우울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웃을 향한 애정과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 그들이 예수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더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가 비난받는 시대, 성령의 감동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