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질 수밖에 없는 육아전쟁
사랑스러운 첫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첫 주는 병원에서, 이후 두 주 동안은 산후조리원에서 생활했다. 산후조리원은 산모가 출산의 기쁨과 동시에 쉼을 누리기에 적절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매일 맛있는 식사가 나오고, 방해받지 않고 쉴 수 있으며, 아이에 대한 모든 케어를 대행해준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산후조리에 유용한 서비스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조리원에 있을 때까지는 육아를 왜 ‘전쟁’이라고 명명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산후조리원 생활이 끝나고 집이 돌아오니 괜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치 엄마 없이 처음 학교 갈 때, 처음 버스 탈 때와 같은 서늘한 긴장감이 피부에 닿았다. 이 생명체를 과연 우리 둘이서 키울 수 있을까. 시댁은 멀리 있고 장모님은 매일 일을 나가시니 도움을 구할 곳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시작한 진짜 육아. 아이는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마 아빠를 부려 먹었다. 아이는 자주 먹고 자주 싸고 자주 잤다. 분유를 타고 데우고 먹이고 트림시키고, 젖병을 씻고 소독하는 일을 반복했다. 쉬를 하거나 응가를 할 때마다 엉덩이를 닦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줬다. 밤마다 깨는 아이를 안고 토닥이며 청소기(백색소음기!)를 돌렸다.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육아는 삶의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이다. 나의 시간과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권력, 그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아니 지극히 일방적인 싸움이다. 대부분의 육아 전쟁은 아이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누워서 똥만 싸고 있는 녀석에게 날마다 진다. 어느새 녀석의 식민통치 아래서 모든 걸 퍼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시간은 녀석이 먹고 싸고 자는 일을 뒤치다꺼리하는데 모두 소비되고 있었다.
보고 싶었던 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해도, 근사한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도, 카페에서 보내는 조용한 독서 시간이 그리워도 녀석에게 자비는 없다. 공감 능력도 없고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녀석에게 나의 취향은 아무것도 아니다. 녀석은 날마다 뽀로로를 보게 했고, 내 얼굴에 이유식을 뱉었으며, 키즈카페 볼풀장에 나를 가두었다.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녀석이 잠든 틈을 타서 게릴라 전을 펼쳤다. 내 삶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도 가보고... 길어야 한두 시간, 짧은 평화를 맛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 빨리 깬다. 그리고 울어재낀다. 나의 평화는 쉽게 무너졌다. 힘도 더 세고 돈도 더 많은데 난 늘 역부족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들 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에서 진다는 말이다. 먹고 싸는 일이 전부인 아이에게 부모를 향한 사랑을 기대한다는 건 무모하다. 부모가 아무리 힘이 좋고 능력이 뛰어나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 사랑 때문에 전쟁을 버티며 웃을 수 있다.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해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를 위한 ‘이유 있는 패배’.
다행히 아이가 커가면서 전쟁의 양상은 조금씩 바뀐다. 무엇보다 엄마 아빠를 향한 아이의 사랑이 커진다. 때로는 그 사랑을 무기로 유혹을 하거나 협박을 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너 지금 자면 엄마가 안아서 재워줄게 ( ˘ ³˘)♥
늦게 자면 혼자 자야 돼 (`A´)"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난다. 혼자서 옷을 입고 쉬를 하고 밥을 먹는 날이 기적처럼 온다! 자기 삶의 영역이 넓어지자 엄마 아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일도 줄어든다. 폭격이 쏟아지던 전쟁터에 이제는 평화로운 휴전의 시간도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아주 가끔씩이지만.
종종 아내와 함께 아이의 옛날 사진을 보며 추억에 빠질 때가 있다. 아이의 돌 사진을 넘겨 보던 어느 날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너무 힘들다고만 생각해서 이렇게 쪼그맣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순간인데... 많이 아쉬워.”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예쁜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아두자. 꼬옥 안아 피부로 느끼고 체온을 나누자. 오늘 이 시간을 그리워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