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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Feb 08. 2018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이처럼 괴로운 시절이 있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교회, 목사, 신자들의 부정과 부패, 범죄 소식들은 '신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든다. 얼마 전 여검사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간증 영상이 이슈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JTBC 앵커브리핑에서는 평양 대부흥과 아골 골짜기를 인용하며 진실된 '회개'와 '용서'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지 못하는 설교를 뉴스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왔다. 교회와 목사를 따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진실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나의 아이>의 저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니라, 책 속에 담겨있는 그의 삶과 진정성 때문이다. 책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다룬 자전적 회고록이다. 사실 저자의 신학적 배경이나 성과를 모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많다. 그의 저서를 한 권이라도 읽어보았다면 좋았겠다 싶다. 그러나 그의 글을 통해 진실된 신앙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는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30년이 넘는 짧지 않은 내 신앙생활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내 나름의 경험과 고민 위에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도 일부는 정리될 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실상 서평과는 거리가 멀다)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지난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생각한 것은 한 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믿음과 우정, 인내 이 세 가지를 꼽아봤다.



믿음,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믿음은 시작한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확실성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확신하는 신실한 태도가 믿음이다.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나이 서른에 비로소 회심(이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했다. 그 후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기도하며 새 일터를 찾기 시작했고, 한 비영리단체에 입사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모든 과정은 믿음을 요구했다. 사회복지도 모르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연봉도 직급도 신입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결혼은 제 때 할 수 있을까. 사회 속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저 하나님을 따라나선 것뿐인데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두려웠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배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다. 길을 잃어 울며 방황하던 아이가 마침내 엄마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안도감. 그런 것이 나를 채웠다.


하나님을 따라 걷는 길은 늘 낯설게 다가온다. 길을 잃어 헤맬 때도 많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평안할 수 있는 삶. 그런 멋진 삶이야말로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은 또 다른 일터에 있지만, 그 직장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참 즐겁고 보람되었다. 심지어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잘 키웠다.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본 것이 아닐까.



우정, 이웃을 환대하는 그리스도의 정신


왜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다.


나는 우정에 대해 많이 말하는 반면 사랑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거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도문이 보여 주듯,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내가 좀처럼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이유는, 현대 기독교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 단어가 감상적으로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무척 가볍게 여겨질 때가 많다. 사랑이라는 말이 주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느낌이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된 실천의 무게를 가려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친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저자는 친구 토미의 죽음을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진실한 질문으로 본인과 친구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잘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 질문에 어떤 답을 얻게 되건, 그 답이 `타자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신비를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와 함께 가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이상한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와 친구가 되어 잘 지낼 수 있는 토미의 비범한 능력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정은 타자의 무한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우정이란 두 인격이 상호적으로 동등한 사랑과 존경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혐오`하고 `경계`하는 태도의 정반대에 서 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이방인들을 모두 환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내게는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누구나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 나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 왠지 내게 피해를 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멀리 하고 싶은 사람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두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영리단체에서 근무하던 때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남편의 학대로 자녀들과 모텔을 전전하던 어머니, 남은 병원비를 납부하지 못해 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던 아버지, 부모님은 모두 집을 나가고 두 동생을 홀로 책임져야 했던 초등학생 남자아이... 때때로 이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통곡이 터져 나왔다. 왜 이들에게 이런 모진 고통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따지기도 했다. 그때 하나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낸 거란다' 고통받고 아픈 이들을 도우라고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가능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돕기 때문이다.


빚지지 않은 인생은 없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사랑, 돌봄, 도움으로 인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누군가에게 보내신다.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라고. 솔직히 자신이 없다. 친구가 되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도할 수밖에 없다.



인내, 믿음과 우정을 지켜내는 일


저자는 정신질환을 가진 아내와 오랜 기간 함께 결혼생활을 유지해왔다. 그가 어떤 슬픔과 고통을 겪었을지 다 알 수 없지만 아내를 위하여 인내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인내는 단순히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경건한 선택이었다.


인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고 귀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수동적인 자세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 요즘은 인내의 덕목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지 왜 고통을 참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피한다고 해서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고통으로부터 도망 다녀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인내와 고통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겠다며 열심을 내던 때, 문득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낙오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저마다 자기 이익을 쫓아 살아가는데 나만 뒤쳐져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뒤엉켰다. 믿음도, 우정도 모두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안과 흔들림 가운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과 우정 덕분이었다. 내 영혼의 불안을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내어놓을 수 없었다면 난 무너졌을 것이다. 나의 길을 믿고 지지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미 믿음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믿음과 우정, 인내가 세 꼭짓점으로 이어져  서로를 붙들어 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느낀다.


가정과 직장,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른다. 내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고 믿음과 우정을 지켜내려는 인내의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억울할 때도 많다. 나만 손해 봐야 하는 때도 있다. 분노할 이유가 있지만 참는다. 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그 한 마디가 오늘도 인내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가능성


나는 여전히 약하고 악하다. 사람과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흔들린다. 사실 믿음과 우정, 인내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간절히 필요할 때 그분께 잠시 빌렸을 뿐. 저자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이 글이 더욱 부끄럽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 지 알고 싶어 썼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나의 아이>를 소개하는 글을 보았을 때 인상적인 인용 구절이 하나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계획도 지도도 없는 여행과 비슷하다. 행선지도 분명하지 않고 돌아갈 고향도 없다. 낯선 곳으로 계속 나아간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겐 주어진 과제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여행 보내신 바로 그 장면이 생각났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중략)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누가복음 9장 1-6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아프고 고통받는 자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그 세상을 이 땅에 만들어 가는 자들이다. 돈이나 물질이 아닌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신뢰할 때 가능하다. 믿음과 우정, 인내라는 삶의 재료로 빚어지는 그리스도인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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