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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Apr 02. 2020

선을 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20 VS 80의 사회> 리처드 리브스

선을 넘지 않는 사회


영화 <기생충>에서 동익(이선균 분)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해 ‘선을 넘지 않아 좋다’고 한다. 여기서 ‘선’이란 무엇일까? 고용주와 고용인을 구분하는 선, 갑과 을을 구분하는 선,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선. 나와는 다른 위치의 존재가 나와 같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선을 넘는 일’이다. 선을 넘지 않아 좋다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어서 좋다는 의미와 같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실제로 선을 넘어오는 일들이 있었다. 볼품없던 개천의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고, 사업 수완을 가지고 밤낮 노력해서 성공하는 기업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벌어진다. 선은 더 높고 견고해졌다.


영화 <기생충>의 동익 (출처: 네이버 영화)


불평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던 미국도 다르지 않다. ‘아메리칸 드림’은 소수에게만 허락된다. <20 VS  80의 사회>는 미국 사회가 경직된 계층 사회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원인이 상위 20%의 ‘중상류층’에게 있다고 한다. 계층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상류층’이라는 표현을 고집한다. 불평등의 문제는 상위 1%가 아닌, 상위 20% 모두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재벌뿐만 아니라, 대기업 맞벌이 가정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대목은 소위 ‘조국 사태’로 드러난 우리나라 중상류층의 모습도 연상시킨다. 중상류층의 자녀들은 부모가 가진 재원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른 계층의 자녀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진다. 좋은 교사나 멘토를 만날 기회, 명망 있는 대외활동에 참여할 기회, 대학원 등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 등등. 그 기회는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고 부모의 계층을 물려받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의 저자인 리처드 리브스는 오래된 계층 사회인 영국 출신으로, 지금의 미국은 영국보다 계층 이동이 힘든 사회라고 한다. 이렇게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요인으로는 크게 2가지를 든다.


1. 능력을 육성할 수 있는 역량 차이

2. 기회 사재기


첫째 요인은 역량 있는 교사의 수업이나 대학원 진학과 같이 시장에서 부가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중상류층이 독점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학교 사이에 교사 역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처럼 보다 시장 가치를 지닌 고등교육은 비용구조가 너무 높다.


둘째 요인은 명문 대학의 동문 자녀 입학, 인맥을 통한 인턴 기회 등 양질의 직장을 얻는데 필요한 기회들을 중상류층 부모들이 사재기한다는 것이다. 명문 대학 출신의 공고한 동문 커뮤니티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형국이다. 


미국이라고 하면 ‘기회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례들을 보면 모두 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공정한 자유인가! 저자의 말처럼 능력을 기반으로 한 시장 경쟁은 촉진하되, 능력을 획득할 기회는 더 공정하고 평등해야 한다. 


출처: pixabay.com



공정한 사회를 위한 조건


저자는 이 불평등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중상류층의 ‘공정함’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 대안들은 교사 지원 프로그램, 대학 학자금 프로그램, 대학 입학자격 확대 등 의미 있지만 미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다. 제도 개혁을 위해 중상류층의 공정함을 기대하는 것도 너무 순진한 일이 아닌가 싶다. 보다 거시적인 관점의 해결방안도 필요하다.


책에 존 롤스가 말한 ‘공정한 사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공정한 사회는 사람들이 계급 사다리에서 자신이 어느 칸에 있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표현으로는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서 그 사회 구조에 동의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정한 사회는 내 자녀가 하류층에 속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부모가 선택하게 되는 사회 구조이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정의’를 옹호하는 중상류층 부모들조차도 기득권을 이용해 기회를 사재기하고, 자녀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유는 계층 하향 이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경쟁에서 한 번 낙오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고, 계층 간 불평등이 극심할수록 기득권에 대한 집착은 더 커진다. 따라서 그런 두려움이 없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잘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다 안전한 사회가 보다 공정한 선택을 이끈다.


출처: pixabay.com


누가 할 것인가?


사회적 안전망.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는 어마 무시한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자 치열한 정치적 전략이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계급투쟁이라기보다 불공정한 기득권에 대한 투쟁이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앞장설 정치세력화도 요구된다. 그렇다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사회의 부조리를 몸소 체험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 불공정한 사회 속으로 자녀들을 내보내야 하는 부모들, 그리고 정의를 위해 용기 낼 수 있는 지식인과 중상류층이 함께 공감하고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더 나은 미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7살 아들이 살아갈 ‘공정 사회’를 희망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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