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Apr 14. 2020

무너진 아이들을 품는다

<사회적 엄마의 사랑법> 오철수

지역아동센터를 알게 된 지 10년쯤 되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동복지단체로  이직하면서부터다. 모바일과 온라인 업무 경력으로 모금 사이트 운영을 맡았다. 전국 각지의 지역아동센터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의 사연을 받았고, 빈곤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때로는 눈물 나게 슬픈 사연들, 때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사연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고통은 대부분은 부모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왜 어른들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지. 사연들을 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을 보듬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지역아동센터는 주로 기초수급, 차상위 등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이 방과 후 이용하는 돌봄 시설이다. 오랜 기간 빈곤 현장에서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던 무료 공부방들이 2004년 법제화되면서 ‘지역아동센터’라는 명칭을 얻었다.


공부방은 국가의 지원도 없었던 시설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운영되었다. 무너진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아이들이 가진 깊은 상처에서는 때때로 날카로운 칼날이 쑥 삐져나온다. 지역아동센터에는 그 칼날에 베여 피 흘리면서도 끝까지 품어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사회적 엄마의 사랑법>에서 ‘사회적 엄마’가 바로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다. 직접 낳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넘치는 생명을 부어주기 위해 헌신하는 삶이 ‘엄마’의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길은 내게서 나왔다   

꿈두레교사 공동창작


아이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내 아이와 노는 데 한두 명 더 붙여 돌보는 게

뭐 어려울까 싶어 오케이 하고

셋 되고 다섯 되고 열이 되었다

그러자 누가 말했다

지하에서 지내는 것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지상으로 옮기고 간판도 달자고

들어보니 너무 옳은 말이어서

또 오케이 하고

놀아주고 밥해주고

언제부턴가 아이들과 잠도 같이 자고

어언 이십 년이 흘러

여전히 아이들과 잠잔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줘 다시

내가 뭔데 아이들이 날 좋아해 주는가 싶어

고마워서 다시 좋아해 준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이십 년 이 길

내 마음이 부르다가 문득 내 길이 됐다



책에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직접 쓴 시 작품들이 나온다. 시를 읽으면 ‘사회적 엄마’들의 삶이 생생한 그림처럼 살아난다. 아이의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헌신, 아이를 믿고 인내하는 사랑, 서로를 품으며 의지하는 관계 맺음. 내 삶에서는 엿보기 어려운 고귀한 사랑법이다. 



우린 귀머거리일지 모른다

송아름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이야기 도중에 선생인 나에게

에이, 씨발년아 하고는 센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이없는 이 장면을

아이들도 다 보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수치심이

나를 삼켜버리는 그 순간

잘 대처해야 한다 잘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큰 소리로 울려

몇 달간 귀가 먹먹했다


센터 선생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어쩌면 나는 귀머거리일지 모른다

나를 보고 있던 겁먹은 아이들을 지키는



소백산에서 태어나다

권정수


백두대간을 타며

이전까지 아이가 한 말이라곤

언제 끝나요 라고 묻는 게 전부였다

틈만 나면 쓰러져 자는 게 전부였다

단풍 드는 산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해

아니면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쯤 할 것도 같은데 늘 똑같은 질문

언제 끝나요 라는 물음이 전부인 아이

종주 중반을 넘어 소백산에 이르렀을 때

뭔가 얼굴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를 쳐다본다

간식을 건네주니 오호라- 처음으로-

선생님 드실 것은 있냐고 되묻는다

그 산에서 일출(日出)을 맞이할 때

아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너무 멋있어요!

17년 인생에서 처음 이 세상을 향해

내뱉은 말, 너무 멋있어요!

온 세상에 아침놀 퍼졌다



책을 쓴 오철수 시인은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과 함께 시를 쓰면서 ‘사회적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인이 가진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풍성한 표현력이 ‘사회적 엄마’들이 가꾸어가는 깊고 아름다운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크다. 법제화 이후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국가 지원이 시작되었지만, 이렇게 소중한 일을 감당하는 분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싫으면 말든가’ 식의 정부 정책은 아이들의 삶을 볼모로 사회적 부모들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자녀의 삶만큼이나 나의 삶, 나의 욕망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뾰족하게 날이 선 남의 자녀를 이렇게 헌신적으로 품는 이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사회적 부모들은 점차 줄어들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인들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다. 



삶이 무너진 아이에게는 복지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부모’가 더 필요하다. 새로운 생명을 품고 낳고 기르는 것은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엄마, 사회적 부모. 우리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문화와 제도들이 뒷받침될 때 낭떠러지 앞에 놓인 아이들의 안전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을 위한 '메타인지' 입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