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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Jul 09. 2020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쁜 사람들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파울 페르하에허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까?


이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의 서두는 직장 내 괴롭힘 사례로 시작한다.

“남성 네 명이 중년 남성 한 명을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나무판에 꽁꽁 싸맨다. 그중 한 명이 두꺼운 사인펜을 꺼내더니 남자의 이마에 0을 두 개 그린다. 두 번째 남자는 자기 성기를 남자의 얼굴에 들이대고, 세 번째 남자는 바지를 내린 다음 남자 위에 걸터앉는다. 남은 한 남성이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모두들 엄청 즐거워 보인다. 이들은 이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한 부 더 복사해 피해자에게 ‘집에서 보라고’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례를 보고 나와는 다른 ‘사이코’들의 얘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겉으로는 젠틀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조직 안에서 부하직원을 모욕하며 성과가 나쁜 직원을 쉽게 해고하는 사람은 어떤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직장에서는 성과를 잘 내면 정상이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비정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가? 윤리의 기준이 공동체적 가치가 아닌 경제적 가치로 바뀐 것처럼 여겨진다.



시장경제 속의 괴물 같은 인격은 특별한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이 책의 원제 ‘‘What about me? : the struggle for identity in a market-based society’가 그 의미를 담고 있다. 무한경쟁의 시장경제 속에서 당신은 어떤 인격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부자 권하는 사회


저자인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사회 환경의 변화가 인간 정체성의 변화까지 가져온다고 한다.


정체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지는 대부분 환경에 달려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낙오하는 이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환경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물론 이 환경과 더불어 우리도 변했다. 날로 분명 해지는 사실은 이런 변화가 어쨌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의 정체성에는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사회적 규범과 가치가 반영된다.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 기반한 윤리가 우리 삶을 지배했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기보다는 자기를 부정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규범을 준수하는 삶이 인정받았다. 중세시대의 사제, 조선시대의 선비가 가졌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종교적 윤리, 공동체적 규범은 뒷방으로 밀려나고 ‘경제적 가치’가 삶의 중심을 차지했다. 2002년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부자 되세요’ 광고 카피가 대표적이다. 이후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돈 세다 잠드소서’ 등 사회적인 덕담은 모두 경제적 성공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덕목, 윤리, 규범, 가치가 무엇인지 방증한다.



역사상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쁜 사람들


구성원들이 경제적 성공에 집착하는 사회에서는 인간관계도 변질된다. 저자가 말하는 ‘엔론 사회’가 오늘날 인간과 조직,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엔론 모델이란 최고의 생산성을 올린 직원에게 보너스를 몽땅 몰아주고 생산성이 제일 낮은 직원은 해고하는 사회진화론의 실행 방안이다. 미국의 대기업 엔론이 20세기 말 ‘등수 매겨 내쫓기’라는 이름으로 이 모델을 도입했다. 직원의 성과를 지속적인 경쟁의 잣대로 평가하여 연말에 하위 10%를 해고했다 물론 해고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다.


엔론 사회의 특징은 ‘등수 매겨 내쫓기’라는 표현에 모두 담겨 있다. 경쟁-평가-보상/낙오로 이어지는 공포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조직 관리 시스템이다. 저자는 엔론 사회에서의 이상적 인간을 “최고의 생산성을 갖춘 남자 혹은 여자”라고 한다. 우리는 무한경쟁 속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자기 계발(생산성 향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기업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놓고 내쫓지는 못하겠지만 성과와 생산성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평가받는 것은 동일하다. 동료와의 관계도, 협력 기업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성과에 기여하지 못하면 배제되고 단절된다. 인간과 조직, 인간과 인간의 관계 모두 경제적 도구에 불과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역사상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쁜 사람들”인 이유다. 경쟁에서 낙오한 자들은 수치심과 무기력감을 느끼며, 승리하여 보상을 받은 자들도 이미 탈진 상태로 미래의 불안은 여전하다. 우린 ‘인간적’ 존재일 필요가 없으며 ‘경제적’ 존재로 요구받는다. 이기적이며 타인에 무관심한 인격은 아주 자연스럽다.



분노와 폭력을 부르는 사회


‘헬조선’ 이란 표현이 2010년대 들어 나타났다. 희망이 없는 지옥 같은 사회라는 의미로서 청년실업, 경제적 양극화, 과다한 노동시간 등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냈다. 이후 ‘금수저’ ‘노오력’ 등의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사회,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결국 허구였음을 폭로한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가진 자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경쟁이며, 돈이 돈을 낳는 계층 간 양극화를 강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에서 드러났듯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외쳤던 386세대들도 ‘경제적 정의’에 관해서는 무관심해 보인다. 부모의 부와 지위가 자녀에게 안전하게 대물림될 수 있도록 모든 방안을 강구한다. ‘그나마’ 정의롭다고 하는 이들의 삶도 이러하다. 때문에 계층 간 유동성이 철저히 차단되고 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에게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현실은 절망적이다. 청년들이 느끼는 무기력과 좌절감이 이해된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는 ‘소확행’은 희망적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세대의 시대 적응 산물이 아닐까. 그나마 소확행을 통해 욕구가 해소된다면 다행이지만 많은 경우 우울과 불안, 때로는 타인과 사회를 향한 분노와 폭력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묻지마 폭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악의 평범함에서 선의 평범함으로


결국 이 시대의 괴물은 무한경쟁 속 낙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경제 체제로부터, 그리고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안기는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탄생한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기본 행동 모델이 숨어 있다. 하나는 매우 이기적이어서 분배와 지배를 추구하며, 다른 하나는 매우 이타적이어서 주고받기에 역점을 둔다. 앞서 4장에서 설명했듯이 드 발은 연구를 통해 이 두 모델 중 어느 쪽이 우선권을 쥐느냐는 환경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이기적인 쪽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 (중략) 현재의 경제체제는 우리의 가장 나쁜 측면을 지원하고 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해도 괴물로 가득한 세계에서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마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고, 친밀함을 나누는 인간적 관계는 단절된다. 쾌락을 위해 성과 소비에 집착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울한 쾌락주의’의 상태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 모두가 함께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저자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는 듯하다. 다만, 냉소주의를 버리고 연대와 협력, 이타주의가 주도권을 가진 환경을 만들어 가자고 한다. 부조리한 체제의 일부가 되어 살지 말고, 내 삶의 환경부터 바꾸어나가는 결단과 용기를 말한다.


가장 먼저 만연한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냉소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배타적 진리로 생각하게끔 유혹한다. 대안이 없다는 동화, 즉 TINA 신드롬(There Is No Alternative)은 오늘날의 위기가 환상의 위기이기도 함을, 아니 무엇보다도 환상의 위기임을 잘 보여준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러고 살다 죽지 뭐”,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자” 같은 식의 숙명론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주의, 경쟁의식, 공격성은 당연히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악의 평범함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타주의, 협력 의지, 연대감, 요컨대 선의 평범함 역시 똑같은 우리의 본성이며, 이중 어떤 특징이 주도권을 잡느냐는 환경이 결정한다. 우리는 영장류에 대한 드 발의 연구로부터 이런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와 영장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다. 가정에서는 한없이 이타적인 사람이 회사에서는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 안에는 선의 평범함과 악의 평범함이 공존한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조금 더 공감하고 협력하는 선을 통해 악한 현실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연대와 협력, 공동체 윤리의 중요성이 다시금 인식되고 있다. 낙오되는 이 없이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물론 ‘우리’를 생각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쟁과 배제의 윤리를 거스르는 것, 연대와 협력의 윤리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삶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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