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에 남은 직선
살아서 나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은빛은 햇살을 흉내 내고
눈은 늘 앞서 달아난다
작아서 늘 무언가의 그림자 속이었고
빠르지 않으면 이름도 남지 못했다
살아서는 도망치느라 바빴다
물살을 등으로 흘려보내며
휘어질 기회를 몇 번이고 지나왔다
죽어서는 햇살과 바람 사이에 놓인다
시간의 결을 따라 모든 물기를 내어주고
비로소 뼈가 드러난다
말라붙은 척추 하나,
국물의 방향을 정하는 일
살은 이미 빠져나갔지만
자기 몫의 직선만큼은
끝내 남겨 두는 법을
나는 알고 있다
국물용 멸치의 말라 있는 척추를
이제 나는 본다
손바닥 위에 올리면 바스락,
소리부터 먼저 늙어 있는 뼈
바다의 푸른 문장을 지나와
국냄비 가장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를 맡는 생애
살은 남기고
뼈는 식탁에서 비켜 놓는다
그러나 냄비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부터
먼저 깊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국물의 방향을 정한다
멸치의 척추는 말이 없다
다만 국물을 깊어지게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다른 것들을 선명하게 만드는 일
이쯤 되면 희생이라 부르기보다
기술이라 불러야 옳다
오늘 저녁 냄비 앞에서
나는 그 가느다란 직선을 배운다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제 역할을 하는 법
이렇게 작은 생애가
이토록 깊은 맛을 남기다니
나는 아직도
멸치 한 줌 넣은 냄비 앞에서
시작의 맛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