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프라이를 좋아하십니까?”
타원의 계란 옆구리를 숟가락으로 톡 내리쳐서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쏟아붓는다. 푹 퍼진 흰자 안에 동그란 노른자가 봉긋하다.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계란이 익기 시작하면 소금을 찹찹 뿌리고 한쪽 면을 익힌 뒤 뒤집개로 뒤집어 다른 한쪽을 익힌다. 이때 기호에 따라 노른자를 꾹 눌러 완전히 익히면 완숙 계란프라이. 뒤집고 나서 수 초 후 바로 꺼내면 노른자가 익지 않은 반숙 계란프라이가 된다.
반숙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얹어 젓가락으로 꾹 누르면 툭 터지면서 밥 위로 노른자 소스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는 완숙보다 반숙을 더 좋아한다. 반숙 계란 프라이처럼 스스럼없이 다른 재료들과 섞이는 모습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누군가는 나를 발랄한 외향형으로 보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차분하고 말이 없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내가 어느 쪽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발랄한 모습도 차분한 모습도 모두 <나>이겠지.
나는 말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 전화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전 미리 해야 할 말을 노트에 적어 놓기도 한다.
내가 어느 때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모두가 나의 말에 귀 기울여줄 때, 한마디로 멍석을 깔아줄 때이다. 특히 그림책 테라피를 할 때 편안하다. 내가 진행할 때도, 참가자로서 참여할 때도 내가 하고픈 말을 충분히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반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어느 타이밍에 끼어들어야 할지 너무나도 어렵다. 그러다 입을 꾹 닫고 듣기만 할 때도 있다. 또 어떨 때는 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이 제멋대로 나불나불 떠들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말실수를 하고 만다. 무의식 속의 내가 의식의 허락 없이 내 입을 움직여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최근 들어 어렵다고 느껴지는 자리는 미사 후 성당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전에는 미사 마치면 바로 돌아오곤 했는데, 아이가 커가면서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사귀게 된 것이다. 친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끝나자마자 쌩하고 나오는 것도 뭔가 정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딱히 할 말은 없고.. 무언가 이야기 해야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 그래서 올해 주일학교 자모회 임원을 맡은 게 어쩌면 오히려 잘된일 처럼 느껴진다. 스몰토크는 힘들지만 내가 맡은 일이 있으니 여러 사람과 함께 머무르면서 봉사도 하고 수다도 떨 수 있다. 얼마 전에 본 일본 드라마 중에 내성적인 성격의 여주인공이 파티 자리에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자처하며 심적으로 편안해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기분 뭔지 알 것 같아 무척 공감을 했었다.
나는 사실 이런 내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내 아들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내 아들은 나와 닮았고 나보다 더 내향적인 아빠까지 닮아있다. 나의 일이 아닌 아들의 친구관계를 엄마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답답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아들한테서 보여서 더 괴로운 부분도 없지 않다. 아들에게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한다. 걱정한들, 잔소리를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타고난 성향을 바꿀수 없으니.
엄마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아들의 대인관계가 걱정되지만, 마찬가지로 아들 본인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티장에서 음식 배분 역할을 자처한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겠지. 아들도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는 것이리라.
오늘 아침 계란 프라이를 해달라는 아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게 내내 마음에 걸린다. 저녁엔 반숙 계란 프라이를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