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혼란스러운 연극 연습

by 이슬노트

인생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누구나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다.

계획한 대로 내가 준비한 대로 그렇게 일이 착착착 진행이 되면, 골치 아플 일도, 고민할 일도 없겠지만. 인생은 결코 우리에게 쉬운 길을 그냥 주는 법이 없다.


핸드팬 연주 기초 영상들과 연주 영상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핸드팬의 매력적인 소리에 푹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없는 악기를 상상만으로 두드려보자니 손이 근질근질하고 답답해왔다.

악기를 검색해 본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중국에서 오는 악기 중에 저렴이들이 있긴 하나, 배송기간이 길다. 아직 이 악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덜컥 구매하는 건 옳지 않다.

좀 더 알아본 후에 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변덕스러운 내가 언제 또 마음이 식어버릴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음은 급한데, 일요일 오전은 바쁘다.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 식사와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시간은 순삭이다.

일찍 가서 핸드팬을 두들겨봐야지 하며 급히 서둘러나갔는데도 연습실에 도착하니 2시가 넘었다. 반장님이 준비해 온 간식으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김신기 선생님도 계셔서 앉아서 얘기를 좀 나눠야 하는 걸까 싶어 함께 자리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저쪽에 있는 핸드팬에 가 있었다.


악기 앞에 앉아보았다. 일단 두들겨본다. 기초 영상에서 연습하라고 한대로 손을 풀어본다.

내가 맞게 하고 있는 걸까. 8비트 박자도 두들겨본다. 소리가 어째 내가 들었던 영상 속의 소리와는 사뭇 다른 듯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40분여 영상을 보면서 이것저것 따라 해 보다가 팀 연습에 돌입했다.


대본상에는 병사들의 토론 1 장면에 유령들은 없었는데, 장면을 좀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유령이 등장하기로 했다. 기괴한 비명 소리를 내야 하고, 귀신처럼 팔을 뻗는 동작을 해야 한다. 가면을 쓰고 할 거라 하니, 이상한 소리도 내고 팔도 뻗으며 귀신이 되어본다.


공연연습 씬의 앞부분을 코믹하게 구상해 보라 했는데 쉽지가 않다. 우리가 준비한 대략의 장면을 어설프게 보여드렸으나, 결국 연출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는 모두가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기로 했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나는 내 역할에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내 대사가 굳이 뱉어야 하는 대사일까?


난타씬에서는 AI가 만들어준 음악으로 박자를 맞춰 연습해 보기로 했다. 박자는 빨랐지만, 연습하면 어느 정도 맞추어지겠지. 연출님은 음악보다는 동작과 장면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음악이 나오기 전까지의 장면도 머릿속으로 구상하신 듯하다.


다시 돌아온 월요일.

어제 연습의 피로가 다 풀리기도 전이라 컨디션이 썩 좋지많은 않았다.

전체 장면을 순서대로 위치를 세팅하며 진행한다. 각자의 역할에 다들 충실하게 연출님이 시키는 대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원래 유령으로 함께 하기로 했던 병사들의 토론 1 장면에 핸드팬 연주가 추가되어 유령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왕의 기도에 핸드팬 연주가 들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핸드팬 연주가 총 네 장면에 나오게 되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동시에 밀려왔다.


공연연습 씬은 더욱더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역시 나는 내 대사를 내뱉기 어렵다. '이 대사를 빼도 되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처음에 생각했던 술 취한 캐릭터는 사라졌고, 이 캐릭터의 정체는 그냥 광대인데, 가만히 무대 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순간이 왜 그토록 수치스럽게 느껴졌을까.

다른 배우들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넉살 맞게 하고 있을 때 관객처럼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왜 그토록 바보 같았을까. 왜 나는 이 순간을 그저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걸까. 왜 나를 두껍게 덮고 있는 이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것일까.

이게 자의식이라는 건가?

왜 연극이란 걸 해보겠다고 신청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이 장면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냥 핸드팬을 멋지게 연주해 보자.

이런 마음으로 무거운 핸드팬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보조 선생님으로부터 카톡메시지가 왔다.


"핸드팬 연주는 '환상' 장면에서만 하기로 했어요. 너무 핸드팬만 치는 것 같다고 건의드려서 결정했어요. 이제 같이 움직임 하실 거예요.!"


???

좋은 걸까... 좋은 거겠지?

나는 전문 핸드팬 연주자가 아니니까...

좋은 걸 거야.

그런데 이 아쉬움은 뭘까.


레어티즈가 핸드팬 연습 중이던 나를 찍어 AI로 중세시대 궁중악사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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