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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Aug 17. 2022

나를 사랑할 용기「미움받을 용기」- 1편

나만의 심리학




「미움받을 용기」 SNS 이웃들을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알았다고 말하며 인정 욕구를 내려놓고 좀 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한 번쯤 읽어봐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관심 있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미루어 두었는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대출해서 읽다가 소장 가치를 느끼고 구매하여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지는 한참 되었지만, 내용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고 미뤘습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부분이 접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문장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나 자신에 대한 알아차림을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데... 접힌 부분이 너무 많아서 글로 옮길 엄두가 안 났던 겁니다.


작가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개인심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쉽게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에서 다루는 내용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일이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중략-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미움받을 용기 36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기분이 우울하거나 기운이 없을 때 과거를 생각하면 부정적인 기억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과거는 아니다.' 라는 결론이 도출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숨이 막히고, 기가 차고, 너무 힘들었는데  ‘시간이라는 망각’이 치료약이 되었는지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는 40년이 지나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 아픔으로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하는 당사자에게 그만 그 속에서 나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당사자만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슴속에 나만의 아픔이 존재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만하면 괜찮다.’ 싶다가도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냐.’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이 되는 것이다.’  

저 또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는 이 시련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 나는 세상에서, 내 삶에서, 내 운명에서 부정당하는 것 같아 그것이 더한 고통으로 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에게 질문합니다.

‘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네. 반면 ‘악’을 뜻하는 ‘카콘’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고,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해 있지.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미움받을 용기 56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자극과 반응 사이 6초라는 공간

항상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다음번에는 화가 날 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리라’ 하지만 막상 화가 나면 소리치고 화부터 냅니다.


화가 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요. ‘나를 이렇게 아프게 했으니 너를 용서하지 못하겠어. 너도 나만큼 아파봐. 그럼 내 마음을 알까?!!’ 


이런 독한 마음, 결국은 나를 더 아프게 합니다. 그걸 아는데도 화가 나면 내 마음이 내뜻 데로 되지 않습니다.


내 손톱 밑에 막힌 가시가 더 아픕니다. 너의 아픔은 보이지 않아요. 독한 표정과 독한 말, 결국은 나와 너를 해치는 행동인데... 어리석게도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래도 항상 결심합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 6초라는 공간, ‘다음번에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리라. 나와 너를 해치지 않는 행동을 선택하리라.’


아가다는 자라는 중, 철들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답니다.




『철학자 :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청년 :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미움받을 용기 62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이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감사일기,

감정일기,

자기 확언,

세로토닌 워킹,

변화하고자 노력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길이 열리겠지?


나도 긍정적으로 살아가겠지?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런데 가끔 노력하는 삶에 지칩니다. 나는 비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좀 더 좌절하고 좀 더 아파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분명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간이 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는 시련을 남들보다 좀 더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난 뒤 마음이 더 편해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다, 괜찮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두렵다면 변화를 위한 한 걸음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미움받을 용기 69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눈치 보던 아이

가족이 한 곳에 모여 다 함께 잠을 자던 시절, 부모님이 다투실 때면 이불을 푹 덮고 자는 척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부모님 눈치를 살핍니다. 어린 나는 아빠 옆으로 쪼르륵 다가가 다리를 주무르며 조잘조잘 신나게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을까요?! 머리가 클 때까지도 부모님이 다투시면 항상 ‘나의 일’ 같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관계의 시작, 가족

나는 부모님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삶을 다 할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처음 만난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경계선이라는 말은 가족 하위 체계 간에 주로 사용되는 말로 직접 보이는 않는다. 그러나 개인과 하위 체계 사이 또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 허용할 수 있는 접촉의 양과 종류는 이러한 경계선으로 구분된다.』

(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360p 천성문 외)     


경계, 그래요.

나는 나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가족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게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들며 아파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허용할 수 있는 경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경계를 침범했을 때 정중하게 요청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경계 또한 지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내 생각과 감정을 꾹꾹 눌러 담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배려, 위로, 사랑, 존경이라는 명목으로 허락도 없이 상대의 경계를 마음대로 침범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배려와 위로를 받아주는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다 말하고 뒤돌아서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나와 너를 지키는 경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미움받을 용기 101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왜 우리 집만 이럴까?

왜 나만 이렇게 아플까?


정말 지독히도 화가 났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은 불공평하다. 내 부모는 왜 이럴까? 술을 진탕 마시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눈물 콧물을 쏙 빼고 있었습니다.


친구 왈

“가시나야? 니만 그런 줄 아나? 다 그리 산다. 우리 부모님도 똑같다.
시골 동네 다 비슷비슷하지 말을 안 할 뿐이지”     


또 한 번은 술만 먹으면 푸념처럼 나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던 나에게 같이 근무하던 상사분이 ‘넌 술만 마시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라고 말하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랑하고 싶은 불행까지는 아니었어도 그 불행 속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계속 헤엄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의 불행 속에서 나는 계속 피해자 역할을 했습니다. 끝없이 나를 피해자로 만들면서 그 문제에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상처에 원망할 무엇이, 분노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는 아무리 반복해서 이야기해도 상처가 옅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불행은 곱씹을수록 배가 된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마음은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 곱씹지 말고 그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2022.8.14. 일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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