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알아차림의 서막
‘나는 상처가 아픈 걸까? 기억이 아픈 걸까...?’
끼익.
진회색빛이 감도는 나무문을 열면 아궁이가 보인다. 엄마아빠가 일하고 돌아오기까지 우리는 아궁이 불을 살려야 했다. 몇 번의 연기를 마시고 눈물을 내뱉기를 반복하고 드디어 피어진 불길을 보면 퍽 안심이 되기도 했다. 부엌문을 열면 정면으로 마주한 또 하나의 문을 통해 바라보는 산과 하늘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치지직
마당을 지나 큰 감나무 아래 수돗가. 그곳에서 식수를 길러왔다. 물을 길어 올 때면, 빨간 바케스 철 손잡이는 작은 손에 두 줄기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렇게 길어온 물로 설거지를 했었나 보다. 그때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날도 있었는지. 뇌리에 남아 있는 설거지 기억은 어찌 이거뿐일까? 혹시 처음이자 마지막 설거지인 것을 이리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가? 그럼 엄청나게 억울할 것 같은데(ㅡ.ㅡ)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칠 때쯤 아빠가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이 놈의 밥풀떼기는 그릇에 끊질기게 붙어있었다. 그 밥풀떼기가 아빠를 화나게 했고 나는 <밥풀떼기를 떼어내지 못한 나를 자책했던가?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빠가 어찌나 목청껏 소리치던지 내 도화지는 온통 검게 변해버리고 바닥에 뒹구는 그릇이 꼭 나 같았다. 아니 갓 10살이 넘었을까? 아이가 설거지를 하면 얼마나 깨끗이 한다고.. 지금 생각해도 입이 불쑥 나온다. 소리치던 아빠와 던져진 그릇. 이 행위의 사실 속에 나는 어떤 것을 더 뇌리에 박아 넣었을까? 아이들이 설거지를 도와준다고 할라치면, 이중일을 하게 될까 한사코 거절하는 나. 그래도 설거지를 해놓은 아이를 볼 때 역정부터 나는 건 왜일까?
『스피노자 윤리학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120p 이시형)
나는 나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