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가다의 작은섬 Feb 24. 2023

오늘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프롤로그. 알아차림의 서막




‘나는 상처가 아픈 걸까? 기억이 아픈 걸까...?’


폭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은 아이는 빨려 들어가듯 창밖을 바라본다. 세찬 칼바람에 살갗이 아릴 정도로 추운 <밖의 세상>. 따사로운 해가 찬란하게 비치는 <안의 세상>. <안과 밖. 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아이>. 아이의 세상에는 어떤 기억들이 오고 갈까.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기억일까. 창밖 세상일까. 따뜻한 코코아 한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 그것이 지금 너와 나 사이의 정의. 그 정의가 안과 밖으로 나누어진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



2010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아이를 마주한 건. 언제부터 존재했던 걸까? 어느 날은 분노 가득한. 어느 날은 눈물 가득한. 어느 날은 세상 외로운 듯. 어느 날은 마냥 행복한 듯. 수만 가지 얼굴로 <나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밀던 아이.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면서 외면하기도. 무시하기도 했다. 진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 애써 아는 척할라치면 아이는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들쑥날쑥 찾아오던 아이가 또렷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순간은. <아네스를 낳고 8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혼자선 힘들었다.. <혼자> 그 아이를 마주 볼 용기도 지혜도 없었다.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4번>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서 도망쳤다. 아니 아이를 더 밑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괜찮아>라는 열쇠를 채워버렸다. 아녜스가 울음을 터트리고. 테레사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 때까지. 요셉이 가슴을 칠 때까지. 


내 삶이 부정당했다.

너로 인해. 이까짓 것이 뭐라고 세상상처를 다 받은 듯. 어쭙잖은 상처가 무기인 듯 그 속에 숨었고.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이에게 가하는 상처를 합리화시켰다. 내가 모난 것도. 내가 못난 것도. 내가 나약한 한 것도. 내가 이기적인 것도. 내가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내가 인정을 갈구하는 것도. 내가 세상에게 강요하는 모든 것이. 네 탓이다. 아이 네 탓이다.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아이 탓이다. 잔인한 아이가 싫었다. 매번 어둠 속에 움츠린 아이가 꼴도 보기 싫었다. 너라는 존재의 쓸모는? 가치는? 뭐란 말인가.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자책하게 만드는가?


나는 홍길동인가?

<아픔을 아픔이다> 당당하지 못하고 내 아픔에서 조차 확신이 없던 내가. 내 삶에는 어찌 당당할 수 있을까. 못되고 보잘것없고 그 모양 그 꼴인데. 다 내가 받을만해서 받은 상처지. 너는 그 가해 앞에 가만히 앉아는 있었나! 너도 같이 죽자고 달려들지 않았나! 순한 양처럼 고스란히 앉아 상처를 받아낸 자만이 상처를 상처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가! 악다구니 쓰며 나도 똑같은 상처를 남긴 주제에. 내가 받은 상처 앞에서. 내가 준 상처의 앞에서. 어떤 총량의 법칙을 가져다 대어야 내 아픔이 당당해질까. 보잘것없는 상처. 세상엔 더한 아이도 많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상처이면서 아무것 같은 상처.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상처를 준이와 상처받은 나 사이에 내가 했던 선택이 나를 홍길동으로 만든다. 부모가 나에게 상처주었던가? 꿀물단물 좋다고 받아먹은 것은 어찌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걸까? 상처 앞에서 했던 내 선택을 위로하고 싶은 걸까? 왜 아이보다. 상처보다. 자책이 먼저일까. 무엇이 각인되었기에. 나는 내 존재에 이리도 당당하지 못할까? 


나는 언제나 그곳에 서 있었다.

아이가 인도하는 곳으로. 때로는 억지로. 때로는 나도 모르게. 때로는 스스로. 걸어간다. 연한 황색 먼지가 날리는 흙 마당, 나는 항상 그곳에 서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그곳. 어두운 기운아래 희미하게 깔려있는 빛 한줄기. 검은 여백으로 가득 찬 도화지 정중앙 작은 흰 동그라미. 무수한 시간, 어두운 여명에 한 줄기 빛을 만들기까지. 곪아터진 상처가 새살이 돋을라치면 다시 상처가 나길 반복하며 보들보들한 새살이 굳은살이 되기까지. 쏟아내고 쏟아내면서 한줄기 웃음을 찾기까지 난 참 많이도 애썼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던. 그래. 나는 살아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말인가? 그래 나는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다.


끼익.
진회색빛이 감도는 나무문을 열면 아궁이가 보인다. 엄마아빠가 일하고 돌아오기까지 우리는 아궁이 불을 살려야 했다. 몇 번의 연기를 마시고 눈물을 내뱉기를 반복하고 드디어 피어진 불길을 보면 퍽 안심이 되기도 했다. 부엌문을 열면 정면으로 마주한 또 하나의 문을 통해 바라보는 산과 하늘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치지직
마당을 지나 큰 감나무 아래 수돗가. 그곳에서 식수를 길러왔다. 물을 길어 올 때면, 빨간 바케스 철 손잡이는 작은 손에 두 줄기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렇게 길어온 물로 설거지를 했었나 보다. 그때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날도 있었는지. 뇌리에 남아 있는 설거지 기억은 어찌 이거뿐일까? 혹시 처음이자 마지막 설거지인 것을 이리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가? 그럼 엄청나게 억울할 것 같은데(ㅡ.ㅡ)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칠 때쯤 아빠가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이 놈의 밥풀떼기는 그릇에 끊질기게 붙어있었다. 그 밥풀떼기가 아빠를 화나게 했고 나는 <밥풀떼기를 떼어내지 못한 나를 자책했던가?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빠가 어찌나 목청껏 소리치던지 내 도화지는 온통 검게 변해버리고 바닥에 뒹구는 그릇이 꼭 나 같았다. 아니 갓 10살이 넘었을까? 아이가 설거지를 하면 얼마나 깨끗이 한다고.. 지금 생각해도 입이 불쑥 나온다. 소리치던 아빠와 던져진 그릇. 이 행위의 사실 속에 나는 어떤 것을 더 뇌리에 박아 넣었을까? 아이들이 설거지를 도와준다고 할라치면, 이중일을 하게 될까 한사코 거절하는 나. 그래도 설거지를 해놓은 아이를 볼 때 역정부터 나는 건 왜일까?



『스피노자 윤리학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120p 이시형)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가면서 생채기가 날 때마다 나는 항상 그곳에 서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평소 떠오르지도 않았던 기억들이 왜 생채기가 하나씩 하나씩 생길 때마다 생각나고 떠오르는 걸까? 그리고 찾아오는 기억의 서막은 항상 그곳, 마당일까? 아마 내 인생의 황량함이 그곳과 닮아서겠지. <나는 설거지를 했고, 그릇에 밥풀떼기-이게 문제임-는 남아있었고, 아빠는 목소리는 높이며 그릇을 내 던졌다>라는 사실 외에 나는 무엇을 더 뇌에 새긴 걸까?


완벽하게 살고 싶었다.

완벽하게 통제하는 삶이길 바랐다. 누구도 나를 공격하지 못하게. 자유롭게 표현하며 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이런 것들을 원하면서 사는지도 몰랐다. 그저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새우며 살았다. 더더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완벽한 삶을 추구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자신의 존재의미를 더 추구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완벽을 추구하지 않아도 안전하다. 내가 하는 설거지에 밥풀떼기가 묻어있으면 다시 설거지할 수 있는 세상에 나는 존재하고 있다.


나의 뇌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들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왜곡시켰을까? 왜곡된 기억으로 내 인생 어느 부분을 나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까? 좀 더 나를 사랑하고 싶다.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싶다.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밝게 빛나던 <로고스> 그것을 찾아 앞으로의 삶이 당당해지길 바란다. 그 바람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이글이 세상에 보이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내가 나에게 당당해지는. 내가 잊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 새롭게 새기는. 바로 그 일의 시작. 상처도 곪아야 새살이 돋아나고 슬픈 기억도 되씹고 비워내야 그 뒤 숨겨진 행복한 기억이 보인다.


나는 나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