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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Jul 25. 2023

덕분에

비장함(2023.6.28. 수)





우왕좌왕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머리카락이 제법 자랐다. <방학을 하면 꼭 미용실을 가리라.> 다짐했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버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은 작정하고 길을 나선다.


오락가락

비가 내린다는 소식에 집을 나설 때는 우산을 준비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짱짱한 햇빛이 가실 줄을 몰라 우산 대신 양산을 펼쳤. 물을 품은 공기는 무겁고 햇빛을 품은 바람은 후덥지근하다. 계절이 바뀌었음에도 추위는 떠날 줄도 모르고 한참을 머물더니 추위와 더위 사이의 중간 계절은 어디로 보내버린 걸까. 중간 계절은 간질맛나게 살짝  맛만 보여주더니, 장마라는 녀석은 한시도 빼먹지 않고 점점 더 빠르게 빠르게 찾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까? 계절조차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 보니 오락가락 우왕좌왕 순서도 제 각각, 조급하고 서두르는 내 마음을 계절에게 덮어씌워버렸나 보다.


사장님 오픈 시간이 몇 시예요.


미용실에 가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리도 비장하단 말인가. 하지만 비장한 마음을 품고 찾은 미용실은 만원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한 시간이나 기다리기엔 역시 내 계획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한번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사소한 마음과 평범한 일상이 항상 우선순위 뒤로 밀려나버리니까.




비장한 계획

머리카락을 자를 것이라는 계획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나온 김에 장은 봐야겠다. 양산을 들고도 한 손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식재료와 과일, 간식거리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오를 만큼 오른 것 같은데 아직도 멀었다는 듯 계속 오르는 물가를 몸소 체험하고 마트를 나서는데 저 앞에 먼저 장을 보고 걸어가시는 할머니가 보인다. 미나리 두 단을 사들고 조심조심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젊은 시절 빠듯한 생활비를 알차게 쓰시려고 매일 같이 장에 가서 그날 먹을 만큼 장을 보셨을 것 같은 할머니의 옛 모습과 내 몸이 허락한 만큼 장을 보시는 할머니의 오늘에 모습, 공존하는 두 세계가 보인다. 살아온 세월은 까마득하지만 치솟는 물가 앞에서는 세월의 차이가 무색할 것 같아 생판 모르는 할머니에게 살며시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차오른다. 미친척하고 슬쩍 말을 건넨다면 아마도 통하고 통하는 대화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지.


할머니, 오늘 미나리반찬하시게요? 요즘 물가가 너무너무너무 많이 오른 것 같아요. 뭐 산 것도 없는데.. 뭐가 이리 비싸데요.




삶의 무게
앞서 걸어가시던 할머니가 벤치를 찾아 잠시 숨을 고르신다. 당신 몸이 허락하신 만큼 산 미나리두단도 함께 걷다 보니 힘에 부치시나 보다. 순간 고개를 돌려 내 한 손에 가득 채워진 장바구니를 보니, 비장함으로 가득 채워진 내 삶을 보이는 것 같아 나의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벤치에 쉬고 계신 할머니를 지나쳐 나도 무거워진 발과 새빨개진 손을 달래기 위해 그늘진 벤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조금 모자란 듯 채워진 장바구니도 집까지 들고 가려니 처음처럼 가볍지 않은데, 삶이라는 장바구니 속에 가득 채워진 비장함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언제까지 저것들을 이고 매고 걸어갈 수 있을까.


할머니 덕분에 벤치에 앉았고, 벤치에 앉은 덕분에 글을 썼다. 글을 쓴 덕분에 한 시간이 흘렸고, 한 시간이 흐른 덕분에 다시 발길을 돌려 미용실에 갔다. 다시 발길을 돌린 덕분에 머리카락을 잘랐고, 나는 오늘 해야 할 일 하나를 완료하고 떠나보냈다. 완료가 주는 만족감, 비장하게 채워진 장바구니 하나를 비워낸 기분이다. 하지만 더 이상 비장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해야 구름 흘러가듯 여유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내 삶은 무엇을 비우고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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