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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Jan 27. 2024

마음은 흐르도록

마음의 초점 (2024.1.10. 수)


"엄마! 집에 언제 올 거야?"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엄마 언제 오나 궁금해서"

"응. 엄마, 4시에 집에 갈 거야"


...


"엄마, 지금 4신데 집에 안 와?"

"엄마 4시에 출발한다는 말이었어"

"아, 그래?! 엄마, 그럼 출발할 때 전화해"

"왜? 엄마 4시에 출발한다니까"

"아니~ 그래도 꼭 전화해~!"


'요 녀석! 무슨 딴짓을 하길래, 자꾸 연락해서 엄마가 언제 오나~ 확인하는 거야! 도대체 집에서 무슨 재작을 부리고 있는 거지? 뭘 숨겨야 하기에 엄마가 언제 오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내 머릿속에서 테레사는 벌써 작은 '악동'이 된 지 오래다. '유튜브 볼 시간은 아닌데.. 혹시 유튜브 보고 있나? 하여튼 이 녀석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어!' 상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불끈' 화가 난다. 동시에 '어, 뭐지?' 테레사는 혼자 있기 무서워서. 엄마가 빨리 집에 왔으면. 엄마가 언제쯤 집에 오는지 궁금해서. 다양한 이유로 엄마에게 연락했을 텐데, 나는 왜 테레사가 '나를 화나게 하는 재작을 부리고, 나에게 숨겨야 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허참.. 놀랍다. 참 가지가지 방법으로 자기 학대를 하는구나'


테레사를 나의 판단(= 평가)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나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했을지라도 테레사는 그저 나에게 작은 '악동'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아이를 의심하고 화를 낸다.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판단(= 평가)'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또는 상황이나 대상을 한 곳에 묶어버린다. 그와 함께 생겨난 생각과 감정도 함께 묶어버린다. 절대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묶인 감정과 생각은 하나의 웅덩이를 만들고 묶어버린 순간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듯 과거와 같은 생각과 감정을 반복해서 만들어 낸다. 영원한 감정 굴레, 그 속에 내 삶도 함께 묶인 줄도 모르고.


비폭력 대화센터 설립자이자 미국 심리학자인 마셜 B. 로젠버그는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폭력을 부추긴다'라고 말했다.


'선생님, 성향상 발표할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잖아요?! 저는 심리검사 결과에서도 사회적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 이건 어느 나라 신종어법인가? 세상은 넓고 언어는 다양하다 했던가? ㅋㅋ 참 오랜만에 듣는 신선하게~ 열받는 대화법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를 당하는 순간 누군가를 무수히 판단했을 '나'가 떠오른다. 제길, 누굴 욕하랴?! <미안하다. 테레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오은영박사는 그의 저서_<화해>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준 것만 기억하고, 자녀는 부모가 못해준 것만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평가하는 사람은 몰라도 평가당하는 사람은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기억하고 것이 바로 '평가'라니..




하루는 비폭력대화 연습모임에서 한 선생님이 '판단과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판단과 평가를 하게 돼서 자책이 되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과 평가도 너무 듣기 싫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를 계속 연습하지만, 아직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어렵다며, 힘든 마음을 털어놓았다. 매 순간 '삶의 선택'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가치, 신념, 감정, 경험 등 수많은 조미료를 가미하며, 무수한 가능성 중에 하나 만을 '선택'하고, 우리가 선택한 하나를 '책임'지며 살아간다. 매 순간 삶의 선택 앞에 서있는 인간이 어떻게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마셜은 '완전히 객관적이 되어 전혀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찰과 평가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NVC는 대상을 고정시키거나 일반화하는 정적인 언어가 아니라 동적인 언어이다. 그러므로 평가는 특정 시간과 맥락에 따른 관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덧 붙였다.


나 원래 그래

너 원래 그렇잖아


'나는 원래 그래, 너도 원래 그렇잖아'라고 말하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으로 계속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다. <'넌 절대로~', '난 언제나', '넌 ~할 때마다', '넌 항상!'>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큰 장애물은 그 사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단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항상> 내 삶을 묶어버리는, 흐르지 않는 고인 물 같은 언어다.


판단과 평가는 내가 삶 속에서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래서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판단과 평가를 <하지 말자>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짐할수록 왠지 더 세상과 사람들을 판단평가 하게 되고, 나를 판단평가하려는 사람들만 눈에 띈다. 내 세상이 온통 판단과 평가로 가득 찬 것 같다. 에잇, 얼마나 많은 묶임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마셜이 말하고자 하는 비폭력대화의 목적은 '각자의 욕구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하여 모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즉, 비폭력대화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느낌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든 그 말 뒤에 있는 느낌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듣게 해 주는 대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욕구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기>에 둠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대화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읽을 때마다 머리에 각인하듯 줄을 그어왔건만,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은 문장은 망각의 시간 속에서 잊히고 각인되길 반복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수없이 읽었던 문장이 이제야 머리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려나보다. 인간은 매 순간 판단과 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 내가 어떤 순간에 어떤 판단과 평가를 하고 있는지, 내가 매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삶은 흐른다. 감정이 흐르는 데로 가만히 따라가 보자. 그곳에 나의 바람이 있을 것이다. 감정은 느끼고, 마음은 흐르게 가만히 두자.


흘러가는 마음을 계속 붙잖아 놓아봤자 고이기 밖에 더하겠는가? 고인 물은 언젠가 썩기 마련이다. 마음이 흐르는 방향은 조절하되 막지는 말자. 이 구멍 저 구멍을 통해 잘 빠져나가도록 방향만 잡자. 그래야 나는 삶 속에서 계속 '나'로 존재하는 동시에, 살아 숨 쉬는 '내'가 될 테니.


그래, 결국 답은 '나'였다.





*사진출처:그림책 <질문상자> 요슈타인 가아더, 답변_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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