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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Jan 17. 2024

보편적인 동시에 독특한 '버팀'에 대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2024.1.11. 목)


'아니, 진짜.. 어쩌고 저쩌고. 애들이 원래 이래요?!! 어쩌고 저쩌고, 남편이.. 어쩌고 저쩌고...'


그녀의 하소연은 다른 누군가에게서도 많이 들어보았고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많이 했을법한 삶의 이야기다. '야. 그땐 다 그래. 애가 크면 좀 괜찮아'라고 말하기엔 어딘가 부조리하고, '야야. 더 커봐라. 어릴 때가 편했지. 지금은 머리 컸다고 말도 안 들어'라고 말하기엔 너무 꼰대스럽다.


테레사는 가끔 학교에서 정체 모를 씨앗을 가져와 베란다에 있는 빈 화분에 심는다. 씨앗에 물을 주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씨앗에서 작은 뿌리가 나오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씨앗에서 새싹이 얼굴을 내민다. 이후 새싹에서 떡잎이 나오고 조금 더 기다리면 떡잎 사이로 본잎이 나온다. 그렇게 정체 모를 씨앗은 자라고 자라서 잎이 풍성해지고, 열매나 꽃을 피우기도 한다. 인간도 이와 같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엄마 뱃속에서 보통 10달 이내의 시간을 보내고 태어나면 고개 들고 뒤집고 앉고 기고 서고 걷고.., 영아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보편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콩나물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의 모습처럼.


그래서 나는 종종 힘듦을 말하다가 '에휴.. 사는 게 다 그렇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남들도 다 그래'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문제로 유난스러운 건 아닌가 싶어 괜스레 세상 눈치를 보기도 한다. 차디찬 겨울을 함께 보내는 가로수길 나무가 모두  같은 모양으로 헐벗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한 자리에서 헐벗은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모진 겨울을 살아내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사람들도 보편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헐벗었다 해도 모두가 똑같은 고통이진 않다. 내 삶 속에서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보편적인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하다. 그리고 '나'는 보편적인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낸다. 그러니 '나'만은 내 삶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삶 속에서,  '나'라는 독특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내 삶을 귀하게 여기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던 차에 지희 작가님의 <책에서 한 달 살기>에서 반가운 문장을 다시 만났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56p> 나무의 삶은 결국 버팀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중략>... 나무에게 있어서 버틴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것이고 어떤 시련에도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버팀의 시간 끝에 나무는 온갖 생명을 품는 보금자리로 거듭난다.


내가 선택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내 삶인데 아무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버티고' 사는 것 같아서 나도 '버텨야'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버틴다'는 단어가 나의 행복하지 않은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나만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지 않고 불편했다.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순간이, 나의 삶을 외면하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굳건히 책임지고 살아낸 적극적인 행위였을 줄이야. '버틴다'와 '살아낸다'를 한 줄로 놓고 보니 왠지 모르게 당당해지는 것 같아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간다. 그리고 잘 살아냈다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지금 마음으로는 모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동안 읊조릴 것 같네. '버틴다'_'살아냈다'  '버틴다'_ '살아낸다'  '버틴다'_ '살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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