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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Mar 19. 2024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 <나이트>

고통을 쓰는 사람들(2024.03.11. 월)


안녕하세요. 글로 상담하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습니다. 작년에 임레 케르테스 <운명>을 읽었고 전반적인 감상평은 '우울'입니다. 작가는 운명이 이끄는 대로 수용소에 갔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곳에서 살아남았어요. 책 제목은 운명이지만, 운명을 넘어선 '한 소년'의 이야기였죠. 그렇게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돌아온 고향에는 임레 케르테스를 환대하는 사람도, 그 일을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요. 당시 임레 케르테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오갈 데 없는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데 어느 기자가 다가와 그곳에서 겪은 일을 글을 통해 고발하라고 말하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글을 씁니다. 그는 뒤늦게 노벨문화상을 받았지만 일생동안 생활고에 시달려요. 존재자체가 죄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이를 갖는 문제로 갈등하다가 아내와도 이혼합니다. <운명>이라는 책 보다 작가의 일생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했어요.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시련이 주는 것은 '신인가? 운명인가?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살아낸 인간은 얼마나 고귀한가?'


임레 케르테스와 <나이트>의 작가 엘리 위젤 모두 십 대에 수용소로 끌러갔어요. <나이트>에 묘사된 생존이야기는 '날것'같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갓 잡아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 것'. 그래서인지 소년이 느꼈을 그 참담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나에게 해일처럼 덮치는 것 같습니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속에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애써 믿고 싶지 않은, 매일매일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믿음과 절망과 희망이 오고 갔을까요..?


책 표지를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소년의 형상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빌고 또 빌었을까요?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분의 뜻이 정녕 무엇일까? 어떤 뜻이 있기에 이렇게 잔인한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우리 모두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라도 알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을까요? 한평생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느님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리고 더 이상 그분을 찾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그 모진 시련을 견디고 있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짐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보다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자유로움을 알아차렸을 때 그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 문장을 읽으니 옛말이 떠오르네요. '긴병에 효자효녀 없다'


빅터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렇게 말해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기다리고 있었을 그 무엇, 가족, 해야 할 일 등이었고 이 이유를 생각하며 살아남았다고. 살아남았지만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그 이유가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하나의 시련이 끝났지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죠.


그래서 일까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먹먹하게 다가오네요.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왔지만, 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겠죠. 그래서 임레 케르테스와 엘리 위젤은 계속 글을 썼을 거예요. 어딘가 분출구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쓰고 계속 쓰면서 그 마음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을 테죠. 




나이트/엘리 위젤/김하락/프랑스소설/위즈덤하우스/228p


99p "내 목숨이 붙어 있는 건 레이젤과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덕분이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112p "입술을 깨물어. 울면 안 돼. 훗 날을 위해 분노나 증오를 삭여야 해. 당장은 아니지만 그날은 반드시 올 거야. 이를 악물고 기다려."


135p 그러나 이제는 간구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내가 매우 강해진 것을 느꼈다. 나는 고발자였고, 고발당한 쪽은 하나님이었다. 나는 두 눈을 뜬 채 혼자 있었다.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었다. 나는 잿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을 오랫동안 지배한 전능자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기도하러 모인 사람들 틈에서 내가 관찰자,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8p 종전 후 나는 그때 의무실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떠난 후 이틀 만에 러시아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166p 죽는다. 끝난다는 생각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못하도록 말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기진맥진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버지는 내 옆에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내겐 죽을 권리가 없었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나는 아버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196p 나는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선택한 죽음, 죽음 그 자체와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을 알았다.


206p 1월 29일 새벽, 눈을 떴을 때 아버지 침대에는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아버지를 끌고 가서 화정장에 넘긴 듯했다. 그때도 아마 숨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207p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 괴로웠다. 내 눈물은 이미 말라버리고 없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한 가지 흐릿한 양심, 그 안쪽을 더듬으면 아마 이런 감정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자유로어 졌다!(긴병에 효자효녀 없다)


211p 자유인으로서 우리가 맨 먼저 한 행동은 음식을 찾아 달려든 것이었다. 그 생각밖에 없었다. 복수를 한다는 생각도, 부모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빵 생각뿐이었다.


212p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게토를 떠난 후 처음으로 내 모습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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