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2025.08.07. 목)
감사랑합니다.
글로 마음을 나누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너는 유령이 되어야 해.'
소설 속 주인공 ‘한해’의 아버지가 처음 호텔 청소부가 되었을 때, 전임자가 그에게 건넨 말이다.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하며 부끄러움 속에 살아가던 아버지에게 ‘유령이 되어야 하는 청소노동자’는 어쩌면 천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에 닿는 순간까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유령'이 되었다.
반면 어머니는 같은 호텔에서 청소를 했지만 전혀 달랐다. 다른 사람이 멋대로 판단하며 부끄러워할지 언정, 자신은 '청소부로 사는 건 즐겁고 행복하다'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소설 『부끄러움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여러 얼굴을 마주했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느끼는 존재 자체의 부끄러움, 풋풋한 사랑의 입맞춤에서 오는 수줍은 부끄러움, 원치 않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느끼는 수치심의 부끄러움까지.
누군가는 그 부끄러움 속에서 스스로를 숨기며 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책은 말한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 사회가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고 책임지지 않을 때라고.
부끄러움.
인간은 왜 부끄러움을 느낄까. 누구나 타인에 의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선택이나 행동으로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성경 속 이야기처럼, 태초에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뒤 처음 경험한 감정도 '부끄러움'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까. 우리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단지 타인의 시선 때문일까. 아니면 부당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는 나 자신 때문일까.
결국 부끄러움은 감추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한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은 주인공 한해가 스승을 만나 우산을 배우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배움이 업(業)이 되고, 그 업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분명 많았을 텐데도 끝내 스승의 가르침을 잇고, 자신의 업을 새롭게 빚어가는 한해의 모습이 '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나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글로 상담하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오늘의 마음 똑똑.
오늘 이 글이 당신에게도 작은 울림과 질문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
- 나는 지금,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나를 숨기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더 진실하게 만드는가.
부끄러움의 시대/장은진/장편소설/자음과 모음/222p
20p 한 사람의 사라짐은 다른 이의 삶을 어떻게든 변화시키거나 변형시킨다. 그래서 다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한다.
38p 아버지는 방문 손잡이에 걸리 '방해하지 마' 푯말을 볼 때마다 어떤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걸까 궁금해했다. 섹스? 잠? 업무? 식사? 대화? 무한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답이 무엇이든 그것이 호텔에서 하는 말 중 굉장히 멋지고 강력한 표현 같아서 따라 해보고 싶었다... 중략... 아버지에게 그것은 힘이었고, 가진 자의 언어였다.
44p 내 이름은 부끄러움 많은 아버지가 자신과 다르게 살라는 의미로 지었다. 매일 떠오르는 해처럼 강하게 살아라, 해년마다 강해져라, 하며 지어준 이름. 강한 해.
50p 스무 살, 어머니는 수학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청소처럼 단순하고 간단한 세상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58p 마음을 아는 게 먼저이고 소리는 그 뒤에 따라야 하는 거니까.
61p 아버지의 부끄러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라는 단순한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타인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사람. 일종의 사회공포증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면 아버지의 머릿속은 어김없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69p 어머니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성공과 실패를 왜 그들이 결정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은 당사자에게 묻지도 않고 어머니의 인생을 실패라고, 불행하다고 규정지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어머니는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청소부가 부끄러운가? 부끄럽기는커녕 청소부로 사는 건 즐겁고 행복하다. 일은 재밌고 마음이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고, 어머니는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81p 모든 일은 포기하지 않는 쪽이 최종 승자가 된다.
82p 네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것처럼.
85p 저렇게 열심히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나까지 아버지를 숨길 필요가 있나. 내가 드러내도 아버지는 천성이 숨는 사람이고, 숨는 게 직업까지 된 사람인데.
94p 누나는 몰랐다. 결혼은 또 다른 현실이란 것을. 현실을 피해 도착한 현실이 별다른 곳이 아니란 것을. 세상 어디를 가도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는 것을.
122p 관계란 도무지 풀기 어렵고 알 수도 없는 방정식인 걸까.
124p 우산... 중략... 편의점에 들러 생수나 컵라면을 사듯 어디서든 쉽고 간편하게 살 수 있는 것... 중략... 하지만 편리함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잃거나 주어야 한다고 스승님은 말했다.
130p 입맞춤을 마치고 난 어머님의 얼굴은 석류알처럼 붉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살면서 느낀 두 번째 부끄러움이었다. 첫 번째 부끄러움이 수치심이었다면 두 번째 부끄러움은 수줍음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부끄러움 밑으로 얼마나 많은 하위 감정이 가지를 뻗고 있는지 깨달았다.
136p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우산을 선물하냐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산을 쓸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의미라더군요. 365일 기억해 주면 좋겠지만 다들 살기 바빠서 그러지는 못할 테니까, 비 오는 날 만이라도요.'
137p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또 한 번의 장례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을 바라보는 일과 그것들을 정리하는 일. 그것은 어머니의 육신을 화장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147p '결혼하고 힘든 날마다 이상하게 꼭 비가 내렸는데, 네가 선물해 준 우산을 쓰고 나가면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어. 그게 꼭 손 같았어.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손. 그때는 그것도 힘이 됐어. 그래서 난 우산 손잡이가 좋아. 우산을 만든다기보다 누군가가 잡을 손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다시 해보고 싶어 졌어'
148p 수업을 받으러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걸었을 때, 수련을 마치고 침묵으로 밤길을 돌아왔을 때, 같이 고민하고 겪었던 고통을 혼자 감내하게 되었을 때, 함께 가업을 이룰 거란 미래가 무너졌을 때. 견기기 힘든 외로움에 누나를 따라 관두려고도 했다. 나만큼 열심히 하지 않은 누나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150p 주변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는 업종이라 이 시간의 나는 지구에 혼자 살아남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153p 이상하게 아버지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중략... 어머니 앞에서의 부끄러움이 좋아함이라면 그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존경심이었다.
168p 청소와 함께 지치고, 아프고, 비참했던 그날의 기억을 깨끗하게 지우고 황홀한 사랑의 기억만 남기기 위해서.
170p 가족경영의 가장 큰 장점은 개인의 욕심보다 공동의 가치를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174p '좋아하는 것들이나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했어요. 아주 나중에 내게 견디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해줄 사람도 생각하고, 내가 견디고 버티면 앞으로도 볼 수 있을 좋아하는 것들도 떠올리고요'
175p '그 시간은 힘을 키우는 시간이에요. 견디고 버티는 동안 차곡차곡 키운 힘으로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얍, 하고 무찌르는 거예요'
176p '각자에게는 시대가 있고, 자기 시대를 견디고 버티는 건 세상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소임이에요. 그걸 다했을 때 행복도 느끼게 되고 기쁨도 찾아와요'
183p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면 귀하지 않은 직업은 하나도 없어요. 의사만큼 중요하죠. 그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청소부 아닌가요?'
190p '죽으려면 한 가지만 하면 되는데 살려면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사는데 더 어렵지 않을까요. 매일 밥 챙겨 먹어야 하지, 예쁜 신발 사 신으려면 일도 해야 하지, 잘 살려면 생각하고 고민도 해야 하지, 연애도 해야 하지.'
193p 이번에도 반성과 처벌은 없을 것이고,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서 앞으로도 이런 사회적 참사는 무한히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바뀌거나 달라지니 않는다면, 이 부끄러운 시대를 어떻게든 끝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사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반복해서 잃을 것이다.
204p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스승님 이야기를 해주는 걸 좋아했고, 듣고 나서는 그들의 견딤과 버팀에서 이어져 나온 것들이 어디까지 닿을지 상상해보곤 했다.
206p 그럼에도 우리를 벌써부터 무력하게 만드는 건 힘을 가진 자들이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할 거란 사실이었다. 힘없는 유족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은 강물처럼 차디찬 거리로 나서는 것뿐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대를 보여줄 수 있을까.
208p 파괴는 인간의 본성이고, 무언가가 있다가 사라지는 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214p 유령이라서 아버지의 삶이 누구와도 닿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름대로 그 속에서도 희미한 줄을 엮어 운명을 이어갔다고. 의미 없는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록 그 삶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낸 삶은 어떻게든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
218p 아버지는 여기 없는데 아버지의 글만 오롯이 남아서 이제는 내게 무엇 보도 소중한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