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조카와 책읽기
사회심리학/로버트 차일디니/더글러스 켄릭/스티븐 뉴버그
11월 1주 일요일
조카에게서 여러 달 동안 읽고 있던 '사회 심리학'을 다 읽었다며 전화가 왔다. 금요일 시간이 괜찮은지. 당연히 괜찮다고 전했다. 조카가 혹시 금요일 야근이 있을 경우 일요일은 어떠냐고 묻길래 그 시간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만났다. 조카가 집에 도착한 후 점심으로 바로 근처 새로 생긴 돈부리 식당으로 향했다. 동네에 못 보든 가게가 생기면 왠지 가보고 싶어 눈여겨봤다 가는 편이라 이번에는 조카 핑계 삼아 갔고 고맙게도 계산을 조카가 했다. 벼룩이 간을 빼먹는 건 아닌지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다.
집으로 와 식탁에 앉아 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카는 책에 대한 전체 느낌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껴왔던 것들이 잘 정리되어진 기분이었다 말했다. 이전에 읽었던 '본성과 양육'이 떠 오르기도 했다며 '순수한 이타적'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네게 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어려운 질문이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이타적 행동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순수한'이라...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런 류의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00%를 '순수한'이라고 봐야 한다면 참 말하기가 애매해진다. 특히 정신적 부분에는 더 한 것 같다. '이타적'과 '이기적'은 서로 반대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얼마나 서로 반대의 의미가 있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글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진화의 시각에서는 생물은 이기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하는 행동은 분명 이기적이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 목적의 행동이 때로는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이 행동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이타적이기도 한 것 아닌까?
행동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이 아니기 에 나를 타인이 이해한다는 것에 한계가 있듯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결국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누가 알겠는가 나의 행동이 이기적인 행동인지 이타적인 행동인지 때로는 나 조차도 알지 못한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게 현실이다. 그런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일어나는 공간이 현실이다.
그럼 '순수한'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99%는 이기적인데 1%가 이타적이라면, 그 1%를 행동을 한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여전히 나는 이런 단어들을 만나면 혼란스럽다.
어릴 때 배가 아프면 주변에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아프냐고 그럴 때마다 난 혼란스러웠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주변에서는 내게 바늘로 찌르 듯 아픈지 아님 할퀴듯이 아픈지 등을 제시하며 묻는다. 난 그들이 바늘로 아플 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내가 바늘에 찔렸을 때의 아픔과 지금의 배 아픔이 어떻게 비교가 되는지 조차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대충 그들이 제시한 답 중 하나를 선택해 말하면 그들은 내게 약을 주었고 약을 먹은 후 배가 아프지 않으면 다음에도 비슷한 느낌에 비슷한 답을 해주고 아픔을 해결했다. 그렇다고 내 느낌에 표현이 충분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나이가 들고 책을 읽으면서도 그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특히 생각과 감정에 관련된 단어들에 대해서는 그 부족함이 여전하다. 그래서 조카의 질문은 한참 허공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꽤 장황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내게 글을 읽는다는 것과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