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ti Jan 22. 2020

소 잃기 전에 고치는 외양간

새해를 맞아 한 살과 더불어 얻은 병명들.



당뇨와 고지혈증, 지방간입니다. 혈액에 꿀처럼 점성이 생긴 상태예요. 이제 혀가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과 술은 못 드시겠네요.



불과 어제 들은 남편의 진단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에 받은 진단명들.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혼 후 신혼을 즐긴다는 명목 하에 둘이 먹고, 마시고, 즐긴 대가를 이렇게 크게 치를 줄은 몰랐다. 당뇨야 시댁의 가족력이 상당하기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병명들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더 큰 병이 아닌 게 어디냐고, 술과 식이만 조절하면 된다고 달랬지만 남편은 여전히 상심한 표정으로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었는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 꼭 어디 가는 사람처럼 그런 소리 말라고, 이제 내가 차려주는 밥만 먹으면 된다고, 꼭 내가 다 고쳐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가끔 남편이 회식을 하고 오는 날에 예상 귀가시간보다 10여분 더 늦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술기운이 오른 채로 어김없이 입가에 초코를 잔뜩 묻히고 들어와서는 아무 일도 없는 체 시치미를 뗐다. 내가 평소 탄산음료와 아이스크림을 가급적 먹지 못하게 제한을 뒀기 때문에, 술을 마신 날(본능에 살짝 가까워진 날)엔 집 앞 편의점에서 몰래 초코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는 아무 일 없던 듯 새침을 떨며 집에 들어오는 거다. 예상 시간보다 왜 늦었냐고 내가 물으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글쎄요! 하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모른 체 넘어간 적이 여러 번인데, 어제 위와 같은 진단을 받고는 그것마저도 못하게 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제 남편에게 걱정 말라고 큰소리는 뻥뻥 쳤지만 당장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무작정 초록창에 병명들을 입력하고, 상단에 노출되는 글들을 읽어 보았다. 다음에는 병명에 좋은 음식을 검색하고 메모했다. 대부분 녹황색 채소들이나 어류, 견과류 등이었다. 그래도 건강 생각한다고 밥상마다 샐러드와 나물을 꼭 놓고, 계란도 무항생제+자연방목으로 골라서 먹었는데. 두부도 꼭 국산콩으로만, 하다못해 고추장마저도 현미로 만든 것만 사다 먹었는데.. 역시 그런 것들보다 안 좋으니 하지 말란 것만 안 했어도 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한 말처럼 더 큰 병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전에, 탈출한 소를 일단 마당 즈음에서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제라도 외양간부터 고쳐봐야겠다. 어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집 앞 편의점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주저하던 남편이 떠올라 마음이 아린다. 그 좋아하는 초코를 이제 뭘로 대체해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 낳겠다는 말, 취소할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