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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 Mar 10. 2020

내가 변한 건 너 때문이야.

가스 라이팅을 당하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근데 왜 못 헤어지는 것 같아?”


약간의 짜증이 섞인 내 물음에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을 뱉으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와 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친구 S는, 한 남자와 수개월째 지리멸렬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나도 몇 번 그와 함께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만난 날 목격한 그 남자의 팔목까지 오는 문신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인사를 할 때 턱만 까딱이는 그 몸짓이었다.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명백하게 문신에 대한 선입견이 아닌, 무례함에 대한 불편이었다. 그렇게 술과 안주들을 앞에 두고 딱히 어떤 주제나 긴 대화 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친구를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가 끊이지 않게 노력했고 친구의 남자 친구는 팔짱을 낀 채 그런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가끔 묻는 말에 응, 아니 등의 짧은 대답만 했다. 친구에게 대답하는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서 어떤 질문을 받아본 적도, 존댓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보다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것이나 외적인 부분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저 남자와의 연애가 수월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기본적인 예의 수준과 태도를 본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한번 더 가진 자리에서도 그 남자는 여전히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친구가 내게 열심히 피력했던 ‘이 사람이 낯을 가려서’가 이유가 아닌 게 분명해졌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내가 그에게 “S랑 예쁜 사랑 하세요. 잘 지내시구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름 ‘S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신 볼 일 없었으면 합니다.’를 완곡하게 돌려서 얘기한 거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처음 몇 달 간은 소식이 없었다. 그래, 연애하느라 바쁘겠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잘 만나고 있나 보네.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S가 별안간 전화를 해왔다. 수화기 너머로 S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읊으며 울먹였다. 한 시간이 넘는 긴 통화에서 내가 알게 된 건, S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남자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것과, 지금 둘의 관계는 S만 놓으면 끝날 거란 거였다.  



사귀기 전과 연애 극초반에는 이렇게 잘해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했다. S의 ‘배고프다’ 한 마디에 다음날 출근하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S의 집 앞으로 와서 포장해온 분식을 차에서 먹이고 간다던지, 함께 감자탕을 먹을 때 절대로 S 혼자 발라먹지 못하게 하며 본인이 위생장갑을 끼고 일일이 다 발라주기도 했다나. 그러다 어느 날은 S가 연극이 보고 싶어서 “이번 주말에는 대학로 갈까? 서울은 운전하기 힘들 테니까 대중교통으로.”라고 했더니, 차를 두고 와도 된다는 S의 말에 감동을 받아하며 고맙다고 했다고. 그의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 어땠길래 데이트할 때 차를 두고 와도 좋다는 말에 저리 고마워할까. 싶어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고 했다. 그렇게 둘의 연애는 서로를 배려하고 감사하며 별 탈 없이 순항하는 듯했다.



사귄 지 한 달이 넘어갈 즈음,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함께 만나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가 주로 어울리는 무리가 있다는 걸 이야기로만 들었던 S는 수락했고, 그의 친구들도 S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면도 트고, 말도 놓고 친해지자 언젠가부터는 주말마다 그 친구들 모임에 나가는 게 데이트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딱히 모임이라기도 뭐한 게 그냥 그 동네에 사는 열댓 명의 무리들 중 그 날 되는 사람들은 나오고, 일이 있는 사람은 오늘 말고 다음날 오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의 매일 모여서 술을 먹는 거다. 어떨 때는 세 명이 모이기도, 많이 모이는 날은 열 명이 모이기도 하는 그 모임에 주말마다 S를 데리고 참석하는 거였다. S는 나와 통화를 하며, 자신이 그 무리의 사람들과 친해졌고 잘 지내는 게 보기 좋아서 자꾸 데려가는 것 같다고 했다. 아, 이 맹추. 걔는 그냥 친구도 만나고 싶고, 너도 만나고 싶고, 술 마신 다음에 잠자리도 하고 싶은 거야.라고 말하고 싶은걸 꾹 참았다. 어쨌든 언젠가부터 그들의 주말 데이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잠자리의 코스를 밟았고, 어떤 날은 심지어 다음날 점심 해장을 그 무리들과 또 만나서 함께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우스운 건, 그는 S가 가고 싶다고 하는 곳이 있으면 툴툴거리면서도 꼭 데려가 줬다고 했다. 가서 볼멘소리를 하더라도 어쨌든 갔단다. 그럼 S는 그게 고맙고 미안해서 그날 저녁에는 그가 좋아하는 그 친구들을 함께 만나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 참석했을 때 말고는 그가 웃는 것을 보기 힘들다고 했다. 둘이 있으면 늘 지루해했고, 카페에서 마주 보고 있어도 휴대폰 게임만 하는 일은 다반사, 함께 셀카를 찍자고 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고. 우습게도 셀카 찍는 걸 거절하는 이유가 “내 얼굴이 너무 작아서 네 얼굴 엄청 크게 나올걸?”이었다고 했다. 아아 이쯤 들으니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넌 뭐라고 했어?

내가 얼굴이 큰 건 사실이니까.. 그냥 아 됐어, 찍지 마 그럼. 하고 말았지.   




S는 그 남자가 변한 게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날을 더해 갈수록 그는 S의 몸매, 헤어스타일, 말투 등등 여러 가지를 트집 잡고 고치라는 말을 하는 빈도가 많아졌고, S는 그 부분을 조심하면 그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줄 알았다고. 그러다 며칠 전 그의 차 조수석 문에서 립스틱을 발견했고, S가 추궁하자 회사 여직원이 두고 내렸는가 보다고, 본인은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고 했다. 본인의 차에서 립스틱이 나왔는데,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더 웃긴 건 S는 여직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주말 저녁, 엄마 가게에 도울 일이 있어 처리하고 오겠다던 그가 밤 새 연락이 두절되었고, 걱정과 의심이 번갈아 들던 S는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어 내게 전화를 한 거였다.  




여러 정황을 아무리 냉정하게 보아도 냄새가 솔솔 나는데도 S는 “엄마 일을 돕다가 피곤해서 잠든 걸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S가 원래부터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애였냐고? 절대 아니다. 자기 분야에서 또래에 비해 나름 빠른 성장을 하고 있었고,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할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모? 물론 절친 필터를 낀 효과도 조금 있겠지만, 키도 적당히 크고, 날씬한 데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친구들 중 ‘예쁜 친구’를 꼽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런 친구. 아니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는 애가 왜 이런 연애를 하며 애닳고 있을까, 싶었지만 나 또한 예전에 이런 을의 연애를 해본 적이 있었기에 최대한 S를 살살 달래며, 그러나 슬쩍 헤어짐을 종용하며 통화를 마쳤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S는 몇 번이나 그 통화의 내용과 비슷한(어쩌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내게 울먹이며 전화를 하거나 만나자는 요청을 했고, 만나서는 술을 진탕 마시고 그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에 가까운 얘기들을 했다. 문제를 발생시킨 당사자에게 하소연하는 모습은.. 어쩌다 당당하고 다정한, 똑똑하고 예쁜 내 친구가 저렇게 됐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미혼인 친구들에게 연애 초반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한다. S도, 나도 결과가 좋지 않았던 남자들은 다 초반에 저 혼자 불타오르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에게 호감도 좀 있는 데다 뭐 이 정도 다정한 사람이라면 괜찮겠지.’하며 시작했던 연애였다. 처음 시작한 연인들이 서로 잘해주는 것은 물론 당연하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가는지도 꼭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이제 나는 네 거! 너는 내 거!’가 절대 아니란 거다. 얘가 예전엔 안 그랬는데.. 변했네?라는 생각이 들면 어떤 이들은 괜히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기 시작한다. 거기다 상대의 ‘지적질’까지 추가되면 환장의 콜라보가 되어 내가 나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명백하게 너에게는 문제가 없다, 너는 여전히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람이라고!’를 말해주는 친구들의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다. 그냥 내가 못나서, 혹은 그 사람이 처음엔 미처 못 봤던 내 못난 부분을 발견하고는 정이 떨어져서 변한 거 아닐까? 하며 자책하고, 나아가 그에게 “너.. 왜 이렇게 변했어?”라는 말까지 한다. 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면, 아니 저 말을 내 입에서 나오게 했다면 이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는 일은 그만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거.  



나 또한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인생의 똥차를 만나 ‘을의 연애’가 아닌 정의 연애까지 해 봤다. 그래서 더더욱 S를 다그칠 수가 없었다. 노련한 상대의 조련에 익숙해진 상태에서는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S처럼 같은 문제로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 곁에 있던 친구들마저 서서히 떠나기 마련이다. 끝내 마음을 굳게 먹고 그와 헤어졌다손 치더라도, 힘든 시기에 의지할 내 사람들이 몇 남아있지도 않다. 나도 ‘정의 연애’를 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 매일 집 근처에 사는 친구를 불러내 술 먹고 주정을 했던 시절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 뜨겁고 창피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건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같은 경험이 있었기에 S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전화기 너머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함께 술을 마실수 있었나보다.





연애를 하며, 또 친구들의 연애를 보며 느낀 단 하나의 진리는 ‘이 사람 아니면 죽을 것 같겠지만, 절대 안 죽는다.’이다. 절대로 안 죽는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람 때문에 죽을 것 같아질 수도 있다. 그때 스스로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쓴웃음이라도) 지어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너무 힘들었던 연애는 시간이 지나면 더 빨리 잊힌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가속도가 붙어서 ‘내가 왜 그러고 살았지.’와 같은 생각만 남고 가슴이 미어지던 아픔들은 깡그리 사라진다. 그런 연애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바보 같았던 내 모습뿐이다. 그리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니 그 기억에 매여 있을 필요도 없다. 내게 상처를 줬던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하게 잘해주며 혼을 쏙 빼놓았다가, 하나 둘 지적을 하며 ‘자신이 변한 이유는 너의 문제 때문’이란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하고 있을 거다. 후려치기를 당한 상대는 맥을 못 추며 자신을 탓하고, 변한 그를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쓰고 있겠지. 남녀의 문제가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또, 가해자의 성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게다가 또, 꼭 연애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 더는 자신의 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너진 마음과 낮아진 자존감을 가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연애가 더 위험하니, 혼자 격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느라 잊고 지냈던 주변인들에게 눈을 돌리고 자신을 충분히 돌본 뒤에 천천히 새로운 만남을 준비했으면 한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그 상황을 겪은 이상 이젠 깨달음은 취하고,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려 노력하면서 지내야 한다. 그렇게 나를 돌보며 살다 보면 언젠간 ‘이 사람과 함께하며 변하는 내 모습이 좋다.’고 느끼게 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 그리고 S는 다정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남편의 넘치는 애교에 가끔 아들인지, 남편인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투정을 전해온다. 이제는 수년 전이 되어버린 아팠던 연애에 대해 서로 굳이 얘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함께 술을 마시다 잔뜩 취한 날에는 가끔 던지듯 내게 말한다. 그때 참 고마웠다고. 그럼 S 못지않게 취한 나도 덩달아 씩 웃으며 전화기를 꺼내, 예전의 나를 받아줬던 친구에게 카톡을 한다. 고맙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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