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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 Dec 27. 2020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첫 직장에 출근한 지 두어달쯤 되었을 때였다. 당시 내 상황은 아주 참담한 수준이었다. 사수는 우리 부서 업무 외에 다른 부서의 뒤치다꺼리들을 다 도맡아 와서 그들에게 생색을 내고, 표면적인 칭송을 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우리 부서의 업무는 업무대로 밀리면서 매일 밤 열한 시 이후까지 야근을 했고, 팀원 중 가장 먼 곳에 사는 내가 마지막 지하철을 탈 수 있도록 자신보다 10분 먼저 퇴근하게 해주는 것이 그녀가 그렇게나 생색을 냈던 '배려'였다.


더불어 지사에 소속된 경리업무를 보던 동갑내기 직원 S도 내게 딱히 친절을 베풀지 않았는데, 불친절하다기보다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것에 가까울 정도였다. 내게 어떤 질문을 한 뒤 내가 한 대답을 똑같이 따라 하며 웃는다거나, 전할 말이 있으면 다른 여직원을 통해 전달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들이 반복됐다.

입사 둘째 주부터 시작된 잦은 야근으로 혼이 쏙 빠져 있었던 데다가 함께 일하는 직원의 냉대까지 더해지니 정신적 피로가 몰려왔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당시 사회 초년생이 미디어를 통해서 보아온 '친구 같은 직장동료'는커녕 제대로 말이나 섞으면 다행인 시간들이 흘러갔다.




당시 회사는 유명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램을 거액의 돈을 주고 구매해서 회사 업무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었는데, 업무 자체보다도 이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이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르는 것을 사수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하나하나 물어봐서 어떻게 일처리를 하겠어?'와 '저번에 알려줬던 것 같은데 또 물어보니?' 이 두 개 문장이 꼭 첫마디에 따라붙었다. 묻지 않고 일처리를 했다가 일을 망치는 것보단 묻고 한소리 듣는 것이 낫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번 수십 개의 변수가 생기는 이 분야의 업무를 저번에 배운 방법에 응용해서 혼자 융통성 있게 '묻지 않고' 처리할 정도의 배짱이 내겐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나른해 보이는 오후였다. 그날도 나는 오전 내내 위의 저 두 문장을 수없이 들었던 터라 사수에게 섣불리 질문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을까 찾다가 책을 읽으며 졸고 있는 S가 보였다.


S는 월초와 월말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과 퇴근 1시간 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늘 책을 읽었다. 업무가 겹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2년이나 먼저 입사했으니 프로그램은 사용은 훨씬 익숙할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역시나 냉대를 받겠지'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번갈아 들었다. 하지만 오전  내내 냉대를 넘어 모욕감을 느꼈던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S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그리고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이 업무는 제가 잘 모르는데, 타 지점 직원에게 물어보고 답 줄게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S가 보인 엄청난 호의에(당시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잠시 멍해졌다. 분명 내 옆에 앉은 사수에게 물어보면 바로 해결될 일이란 걸 S도 알고 있었을 텐데, 내 입장을 고려해서 타 지점 직원에게 물어봐주는 게 분명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부담을 동시에 느낀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S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고, 결국 나는 그녀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침 인사를 수없이 건네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호의들을 베풀어봐도 거리를 좁힐 수 없었는데, 내가 청한 '도움' 하나로 그녀와 가까워지게 된 것이 놀라웠다. 나중에 S와 가진 술자리에서 나는 그녀가 입사 때부터 나를 싫어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최종 면접을 함께 봤던, 내 옆에 앉아서 같은 질문에 대답했던 그 여성이 S와 친한 동창이었던 거다. S는 그녀와 함께 일할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나로 인해서 모든 게 틀어졌다고 생각했고 많이 미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유지만 당시 우린 어렸으니까.

아무튼 그 와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나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이후 우리는 사수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몰래 만나 함께 양치를 하고, 변기를 의자 삼아 짧은 잡담을 나누며 울고, 웃었다.


몇 년 전까지는 '내가 도움을 청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S와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까.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 그때를 회상해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먼저, S가 나를 왜 싫어하는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자책하며 잠들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 인해 그녀의 지인이 입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도 '설마 그 이유 때문이겠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테니까. 결과는 아쉬워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을 미워하는 건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나는 그렇게 '스스로는 영원히 밝혀낼 수 없었을 이유'를 내게서 찾으며 자책하고, 고민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그 시간은 불필요했다고. 내가 아무리 나의 문제 수십 가지를 떠올려 이유를 찾으려 한들, 저 밖에는 수백수천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지금도 아예 사라진건 아니지만 예전과 같이 오만할 정도의 확신은 많이 옅어졌다. 하지만 이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어렴풋이 안다.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일은 없다. 그들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테고 그건 '정말로' 내가 알 수 없다. 만일 그쪽에서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내가 판단해서 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도 있고 혹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라면 그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하는 지표로 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저 나를 싫어하기만 하면서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 이유를 알 필요조차 없으니 구태여 자꾸만 나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상대의 내면에 움츠리고 있는 어떤 생각이나 아픔에서 기인한,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그 가시들을 왜 굳이 맞아줘야 할까. 그냥 '그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뭐 똑같이 미워하고 앙갚음할 정도도 안 되는, 말 그대로 '저 사람만의 문제'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다.



이후 S와는 종종 전화로 소식을 나누다가 요즘은 SNS로만 서로 안부를 묻는다. 내가 만약 그때 그녀를 미워했다면 먼저 말을 걸었을 일도, 도움을 청했을 일도 없었을 거다. 당시에 자책만 하면서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던 내가 조금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에서 자책만 빼고 살아가려 한다.


자책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살도록.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모두 미워하면서 살면 참 피곤할 것 같으니까. 뭐 결국은 다 나를 위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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