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양파를 보관하던 박스를 열었다. 꽤 긴 시간 손대지 않아서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양파 두 알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온전한 상태로, 또 하나는 삼분의 일 가량이 짓무르고 거뭇한 곰팡이가 슬어있는 상태였다. 곰팡이가 더 번지기 전에 얼른 껍질을 벗기고 무른 부분을 도려내 먹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상한 양파를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곰팡이가 슨 부분에 최대한 칼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한 꺼풀씩 벗겨내고, 칼을 곧게 세워 양파 안으로 밀어 넣으며 양파를 다듬다 보니 수년 전에 여동생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 언니가 옛날에 양파에 대해서 얘기해줬던 거 기억나? 우리 같이 자취할 때. 오랜만에 둘이 파스타였나, 무튼 뭘 만들어먹으려고 양파를 봤더니 하나는 반이 상해있고 하나는 괜찮았는데 난 당연히 상한 것부터 먹을 줄 알았거든. 근데 언니가 멀쩡한 걸 집어 들길래 내가 왜 그것부터 먹냐고 물어봤잖아. 그때 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덜 나쁜 것부터 먹을게 아니라 좋고 나은걸 골라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랬어. 어차피 지금 다 먹을 수 없을 거라면 말이야. 다음에 다시 열어보면 괜찮았던 양파도 또 반이 물러있고, 결국 무른 양파 반쪽씩을 먹게 될 거라고. 그 당시에 나는 언니 말이 이해가 안 됐었거든. 근데 살아보니까 그때 언니가 했던 말이 두고두고 떠오르더라고."
양파의 썩은 부분을 벗겨내고, 열심히 도려내는 이 순간에 그때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오를게 뭔지. 당시에는 동생에게 들으면서도 내가 저런 이야기를 했었나 가물가물 했었다. 그렇게 동생이 인상 깊게 들었던 말은 또다시 내게 인상 깊은 말이 되어 이렇게 양파를 도려낼 때마다 떠오른다. 덜 나쁜 것을 서슴없이 포기하고 좋고 나은걸 당연하게 선택하던 때가 있었구나, 싶어서.
손질한 양파를 채 썰어 버섯과 함께 볶았다. 오늘 저녁 밥상에 올리면 무의식 중에 가급적 다른 반찬보다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은 더 젓가락이 가겠지. 그리고 옆에 있던 오늘 만든 반찬은 내일 밥상에 다시 올라올 거고, 나는 또 무의식 중에 빨리 먹어야 하는 것에 젓가락을 더 댈 거다. 아무래도 식재료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금은 양파 반 알을 양파 반 알로만 보는 게 아니라, 주변인의 수고나 생산자의 노고로 확장시켜 생각하게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은 무르고 상한 양파에 먼저 손이 가는 사람이 되었다. '까짓 거 버리면 되지.'가 잘 안 되는 사람으로.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계획했던 일의 상당 부분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나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입에 올리는 건 자제해왔지만, 따라오는 무력감과 우울감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고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코로나도, 흘려보낸 작년에 대한 아쉬움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감정들도 그저 이렇게 머물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떠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실로 '까짓 거 버리면 되지.'가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