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이 회사 탕비실의 티스푼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물어왔다. 현재는 누가 치우고 있냐고 물으니 막내 여직원이 티스푼과, 티스푼을 담가두는 컵을 매일 퇴근 전에 씻어둔다고 했다. 남편이 평소에도 직원들의 복지 혹은 분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사안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자칫 소소한 문제라 느껴질 수 있는 사안이라 내심 놀랐었다. 회사 내에서 탕비실 설거지 문제로 극대노하고 회사를 때려치운 경험이 있던 나는(아주 많은 문제들 중 하나였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남편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대개 남편의 직급이었던 내 상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출근해서 깨끗한 머그컵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머그컵을 누가 닦았는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구체적인 지시는 그 중간의 직급들이 했다. 자신들이 하던 ‘설거지’ 업무를 물려(?) 준 중간 직급들도, 알면서 묵인하고 자신들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채 그에 따른 편리만 취하는 그 윗 직급들도, 설거지를 하던 막내에게는 모두 다 가해자였다.
나는 20대 중반이 넘어서 이전에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했다. 협의를 통해 처음 사측에서 제시했던 연봉보다는 조금 더 받게 되었다. 이 분야의 경력이 전무한 만큼 신입의 자세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사하고 일주일이 넘어갈 때까지 그들은 내게 퇴근 전에 컵을 닦아야 한다거나, 30분 일찍 출근해서 상사들의 책상을 닦아야 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출근한 지 열흘쯤 됐을 무렵, 선임이 퇴근 준비를 하던 내게 와 조용히 설거지가 잔뜩 담긴 통을 가리켰다. 원래 막내가 하는 건데 일주일간은 적응해야 하니까 원래 막내였던 애가 했어. 이제 네가 하면 돼.
원래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을 이전 막내였던 사원이 했으니 미안해하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통 안에는 손님을 접대했던 찻잔들이 담겨있었다. 이곳의 임원들은 손님에게 종이컵으로 차를 내지 않았다. 일종의 예의라나. 그들은나에게는 너무도 무례했지만 별 수 없이 닦으러 화장실을 가려던 찰나, 선임이 내 앞을 막았다. 다른 분들 자리에 가서 컵 수거해 와야 해.
퇴근 전 하는 설거지 외에도 막내에게는 하나의 업무가 더 주어졌다. 출근시간 30분 전에 나와서 상사들의 책상을 닦는 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존의 막내도 함께였다. 원래 두 명이 하는 일인데, 내 자리가 공석일 때는 혼자 다 해왔다고 했다. 몇 년을 했냐고 물으니 약 4년간 책상을 닦았단다. 차라리 이런 업무(막내가 거부할 재간이 없으니 주어진 업무라고 봐야 될 듯하다)가 있다고 면접에서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당연히 입사하지 않았을 테지만, 아주 노련했던 이 회사는 입사 후 열흘 뒤에나 알려주었다. 마치 ‘이게 싫어서 퇴사하게 된다면 너는 취업준비를 다시 시작해야 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침 걸레질은 둘이 함께 하니 그나마 서로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대표 책상에 놓인, 전날 사용한 치간칫솔을 치울 때는 역겨움을 넘어서 이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계급차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날 책상을 닦을 막내들이 자신의 치간칫솔을 치워야 할 것을 알고도 이렇게 하는 건가? 이 환경에 놓인 내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스스로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무서웠다. 1년만, 딱 1년만 버티자. 스스로를 다독이던 시기였다.
나는 그렇게 약 7개월을 퇴근 15분 전에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며 그들이 사용한 컵을 수거하고, 손님이 오면 차를 내고, 그 찻잔들을 수거해 닦았다. 퇴근 전, 쟁반을 들고 각 방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 업무 중인 그들 옆에 놓인 컵을 집어 들고 나올 때면 올라오는 모멸감에 귀가 빨개졌다. 이 일이 마치 내 업무인 것 같아서.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 같아서. 컵을 수거할 때면 그들은 늘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맙다는 인사 따위 안 들어도 되니 자신이 마신 컵은 자신이 닦아 쓸 수 없을까? 그렇게 7개월을 참았던 이유는 이 분야 일을 배우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내 계획은 1년을 버티고 이직하는 것이었으나 더는 참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오후, 한창 업무 중이던 나를 부장이 호출했다. 출산휴가를 떠난 과장의 자리를 잠시 쓸 일이 있으니, 걸레를 빨아와 키보드와 책상을 닦아달라는 거였다. 들으면서 내 귀를 의심했다. 아침 걸레질과 저녁 설거지는 정해진 회사 룰이라고 치더라도, 이번 일은 도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가 너무 태연히 말하니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싶었다. 귀가 새빨개진 채로 걸레를 빨아다가 키보드와 책상, 마우스를 닦았다. 부장은 뒤에서 걸레질하는 나를 지켜봤고, 걸레질을 마치고 나니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걸레를 만져도 되는 손’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퇴근하고 전철역까지 걸으며 많이 울었다. 만난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 수치스럽고 가슴이 꽉 막히는 감정을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이런 건지, 이 사무실이 이런 건지, 이 사람들만 이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한 채로 먹먹한 마음을 안고 퇴근하던 길에 남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남자 친구는 단박에 내 기분을 알아채고 퇴근 후 집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결국 남자 친구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 눈물이 고였고, 오늘 있던 일 전부를 털어놓았다. 털어놓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걸레를 만져도 되는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남자 친구에게 고백하는 것 같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회사에서 했던 이 잡무들을 알게 되면 남자 친구도 나를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슬며시 들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회사 내에서의 나의 위치를 진짜 나의 가치와 동일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을 겪고 바로 다음날 퇴사 의사를 밝혔다. 다음에 적을 둘 회사를 구하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사의를 표했다. 이 분야의 모든 사무실이 이렇다면 더 이상 이 일을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간관리자급이 된다고 해도 아래 직원에게 설거지와 걸레질을 지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윗 상사 들은 누군가가 설거지를 해주길 바랄 거다. 그럼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거고, 나눠서 하건 어쨌건 간에 남이 쓴 컵을 계속 닦아야 한다면 차라리 카페에 취업해서 닦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내가 카페에서 해야 할 업무가 뭔지는 정확히 알고 선택한 것일 테니까.
이후 나는 오기로 같은 분야의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했다. 젊은 대표가 막 차린 회사였다. 나는 손님이 와서 차를 내 가야 할 때는 작은 병에 든 음료로 대신하자는 건의를 했고 내 의견은 관철되었다. 이전 회사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급여와 대우는 훨씬 좋았다.
그리고 이전 회사에서의 그 일을 듣고 퇴사를 강력하게 종용했던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이 얼마 전 탕비실 티스푼을 없앨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어왔다. 남편 또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몇 년간 연구실에서 매일 혼자 컵 설거지를 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설거지는 여사원의 부당한 숙제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비단 성별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티스푼이 꼭 필요한가? 다들 종이컵을 쓰긴 하지만 회장 및 임원들은 믹스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했다.
여럿이 돌아가며 씻을 수는 없는지? 다른 직원들은 외근이 많아 정해진 날짜를 지키기 어려울 것 같고, 그 여직원은 항상 사무실에 상주하는 내근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인 일회용 티스푼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 환경문제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종이로 된 티스푼은 괜찮을 수 있겠다.로 대화를 마쳤다.
새삼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남편이 고마웠다. 설거지를 하는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당사자 또한 이쯤이야.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이로 바뀌어있는 티스푼을 보면 막내 여직원은 어떤 생각을 할까? 배려라는 건 애초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사용할 자리의 먼지를 아랫직원을 불러 닦게 하는 것이 어떻게 당연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행위 자체로는, 모두가 쓰는 티스푼을 여태 혼자 닦아온 막내 여직원이 모두를 배려해왔던 것에 가깝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