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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14. 2019

BGM은 City Pop

여유를 부릴 때 듣고 싶은 음악이 있다. 그럴 때는 주로 라운지 음악이나 스파에서 틀어 줄 법한 zen 스타일의 명상 음악을 틀어놓는다. 음악이 주는 효과는 언제나 실로 크다. 음악에 따라 내가 속해있는 배경이 달리 보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있노라면 내가 있는 곳이 호텔 라운지가 되고, 방갈로로 만든 리조트의 로비가 된다. 



치앙마이에서는 자꾸만 City Pop이 떠오른다. City Pop은 80년대 중반부터 후반부까지, (길게는 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주름잡았던 대중음악의 장르다. 말 그대로 그 시절 일본 대중가요다. 일본에서 City Pop이라는 장르로 이름 붙였지만 사실 그 시대 전반에 걸쳐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던 신시사이저 팝과 재즈 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스타일이다. 


여유로운 치앙마이의 분위기에 자꾸만 City Pop이 떠오르는 이유는 City Pop의 태생 자체가 ‘여유’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던 일본의 80년대 중후반 기는 버블 경제 시기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시기에는 모든 것이 낙관적이며 장밋빛이었다고 전해진다. 젊은이들은 연일 술과 유흥을 즐기며 연례 없는 경제 호황기를 누렸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어도 그 시대의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일본에서 80년대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89년생인 나에게는 추억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다. 수입되어 우리나라에 들여와 방영한 시기가 대략 90년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이다. ‘뾰로롱 꼬마 마녀’ 나 ‘꽃의 천사 루루’, ‘세일러문’ 따위의 만화영화는 버블 시기의 특징인 고자본 고인력(?)의 퀄리티 넘치는 작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어딘가 알 수 없는 여유와 낙관, 낭만, 미지의 세계에의 동경 등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에도 그런 사소한 디테일을 남다르게 느꼈던 것 같다. 여전히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불리는 일본이지만 그런 애니메이션은 그때 이후로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한 살부터 세 살까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일본에서 잠깐 산 적이 있다. 비록 버블 시기를 빗겨 간 90년대 초반이었지만 경제 호황의 잔상은 그 시절 일본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도 무수히 느껴진다. 사진의 잔상들이 나의 기억으로 재구성되고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을 향수로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예전 일본 가요들을 들으면 마치 그 시대의 일본을 경험했던 사람처럼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City Pop을 좋아하는 층이 그 시기를 살아온 일본인들만은 결코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10대, 20대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City Pop 마니아층이 있다. City Pop이라고 하는 장르를 대표하는 마리야 타케우치나 준코 오하시 등의 음악은 유튜브에서도 상당히 다양한 연령대와 국적에 걸쳐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City Pop이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가 있는 것처럼 존재를 공고히 한 일본을 보면 역시 자기들 것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천부적이라는 생각이 또 한 번 든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정도의 우리나라 대중가요에도 City Pop과 유사한 신스팝 계열의 음악이 제법 많다.) 


City Pop을 듣고 있으면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 루프를 열어젖힌 오픈카를 타고 즐기는 한낮의 드라이브,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원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소녀들, 빨강 파랑 초록색 따위로 알록달록한 옛날식 파라솔 밑에서 시시껄렁한 일간지를 읽으며 일광욕을 하는 소년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치앙마이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화려한 도시도, 파라솔이 늘어선 해변도 아닌데 그렇게 매일 City Pop을 듣고 싶어 진다. 콘도의 수영장 선베드에서도, 정열적인 레드의 타코 집에서도, 숙소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할 때도, 치앙마이의 선곡은 단연 City Pop이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욕실 문을 활짝 연다. 거실과 방은 에어컨으로 냉방을 빵빵하게 틀어둔다. 겨울에는 영하의 야외에서 뜨거운 노천탕에 들어가는 게 최고의 행복이고, 여름에는 두툼한 이불을 둘둘 싸매고 에어컨을 19도로 틀어버리는 게 말 그대로 행복이다. 물에서 올라오는 훈증과 밖에서 들어오는 냉기가 적절히 섞이면서 기분 좋은 노곤함을 완성한다. 거기에 블루투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City Pop. 치앙마이에서의 하루를 마감하기에 완벽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기분을 업시키거나 한껏 충전할 때 City Pop을 크게 틀곤 했는데, 치앙마이에 와서는 여유에 여유를 덧칠하는 기분이라 어쩐지 럭셔리한 사치라도 부리는 기분이 든다. 마치 푸아그라에 트러플과 캐비어를 얹어서 맛보는 기분이랄까. 이곳에 온 이후로는 모든 감각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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