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대비한다는 말 뒤로

나는 실패를 대비하는 걸까, 도망치는 걸까.

by isol

실패할 경우의 수를 먼저 떠올린다.
가장 최악을 생각하며 대비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면 된다고 믿고 앞으로 가야 하는 걸까.



나는 크게 성공하고 싶다.
그런데 늘 가장 안전한 선택만을 떠올리고 있다.
이건 신중함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조종사를 떠올려본다.
최고의 조종사는 어떤 사람일까.



엔진이 꺼질 가능성,
바다 한가운데서 항공기가 추락할 가능성,
현실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을 작은 경우의 수까지도
모두 계산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사람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나다.




나는 실패했던 경험이 많다.

그 경험들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조종사를 꿈꾸며 앞으로 달려가도 되는 걸까.
실패한 내가 성공을 꿈꿔도 괜찮은 걸까.




나는 성공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실패의 기억이 나를 붙잡는다.
열정을 내어 보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조종사가 될 자격이 없다.




의식이 그 목소리를 이기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조종사가 비행을 잘할까.




모든 역량이 뛰어난,
이른바 육각형의 사람이 비행을 잘할까.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조종사,
엘리트 의식이 깊은 조종사,
‘조종사’라는 이름 자체에
자존감과 명예를 걸어버린 사람은
과연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할 수 있을까.




우러러봄에 중독된 사람은
비행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비행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나를 믿지 말고 대비해야 하는가.




최악을 생각하라는 말은,
나이키 사장님의 말처럼
담담한 조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나는,
‘최악을 대비한다’는 말 뒤에 숨어
무의식적으로
조종사가 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 태도가 대비인지, 두려움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조종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인식한 채로도
조종간을 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최악을 떠올리면서도
앞을 향해 훈련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