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
영화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필자가 여태껏 영화를 보면서 가장 괴롭다고 느꼈던 순간에 대해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 영화는 바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었는데, 해고의 부당함을 항의하기 위해 극중 팽 기사(기주봉)가 사장 동진(송강호) 앞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서너번 칼로 긋던 장면을 볼 때였다. 그때 팽 기사는 흰색 런닝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칼질에 벌어진 틈 사이로 그 흰색 셔츠가 점차 빨간 피로 물들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마치 내 복부가 칼로 그어지는 듯했던 그 날카로운 폭력의 간접 체험이 ‘마터스’에서는 영화가 상영되는 100여분 내내 그대로 되살아났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마터스’는 그러니까 필자를 사상 최고로 괴롭게 만든 영화였던 셈이다.
쉽게는 접할 수 없는 프랑스산 호러영화 ‘마터스’는 200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고 이후 이 영화에 대한 리뷰 기사에는 하나 같이 ‘끔찍한’, ‘잔혹한’, ‘충격’, ‘전율’ 따위의 수식어들이 달렸다.
과연 영화 ‘마터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매우 잔혹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아무렇게나 짧게 잘린 머리, 멍과 피투성이로 엉망이 된 처참한 몰골의 소녀 ‘루시’가 오랜 시간 감금됐던 모처를 탈출하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보기가 괴롭기 짝이 없다. 이 괴로움은 15년 후 성장한 ‘루시(밀레느 잠파노이)’가 평범하고 단란한 한 가정의 네 식구(십대의 두 자녀를 포함해서)를 다짜고짜 살해(혹은 처형)하는 장면에서 충격으로 바뀐다. 죽어간 네 식구나 이를 보는 관객이나 루시가 왜 그들 모두를 냉혹하게 죽여야 했는지 영문을 모른다.
이에 대한 이유는 곧 밝혀진다. 어린 시절 끔찍했던 그 사건 이후 루시를 평생 따라다니는 ‘발가벗은 어떤 여인’의 지령 때문이다. 물론 ‘발가벗은 여인’은 실체가 없는, 루시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 이 끔찍한 환각에 시달리는 루시를 안타깝게 지켜보며 묵묵히 보살펴주는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안나(모르자나 아나위)’다.
어린 시절 불행한 기억으로 평생을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여자와 그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또 다른 여자의 이야기. 영화 ‘마터스’는 이 ‘벌거벗은 여인’의 한을 풀어주는 두 여자의 퀴어 호러 영화일 것 같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딱 절반까지의 스토리다.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호러라는 장르의 틀을 내던지고 ‘신앙’과 ‘폭력’, ‘종교’와 ‘성녀’ 등 무지막지하게 철학적인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렇게 영화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데 혼란한 틈을 타 ‘마터스’는 폭력의 가학으로 시종일관 관객의 살갗을 일정한 강도로 자극한다. 정체성의 혼란, 지속적인 폭력의 가학, 쏟아지는 철학적 물음에 관객들은 점점 기진맥진, 넋이 다 나갈 지경이다.
이렇게 영화에 지쳐갈 즈음 지독한 폭력과 지독한 신앙, 이 상반되는 듯 어딘가 모르게 통하는 두 의미가 ‘천국을 보는 눈’ 안나의 눈동자 안에서 하나 되는 걸 지켜보노라면 차라리 멍해지고 만다. 폭력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것인지, 신앙을 폭력으로 치환시킨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정작 영화를 만든 장본인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이에 대해 “단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 것일 뿐”이라고 하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고통과 물음표만을 머리 속에 가득 남겨둔 영화 ‘마터스’는 그 후유증이 제법 오래 갔다. 추천은 차마 못하겠으나 과감히 이 영화에 도전하겠다고 나선 관객에게는 격려의 박수와 함께 그 용기를 치하하는 바이다.
(2009년 7월 작성)
제목 -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 (2009, 프랑스/캐나다)
OTT - 웨이브,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