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프트'
촉망 받는 젊은 작가 레이코(나카타니 미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마른 기침과 함께 시작된 슬럼프에 그녀는 시시한 연애 소설 한편 쓰기도 버겁다. 슬럼프가 지독해질수록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던 레이코가 울컥 토해낸 것은 뜻밖에 시커먼 진흙이다.
환경을 바꾸면 좀 나아질까. 레이코는 편집장의 도움으로 제법 깊은 산 속 어느 로프트로 이사를 온다. 그렇지만 그녀가 토해내는 진흙의 양은 더 많아질 뿐이고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어떤 남자가 비닐 포대기에 싸인 흡사 시체 같은 것을 집 옆 창고에 갖다 두고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시체인 줄 알았던 그것은 다름 아닌 진흙 속에서 발견한 천년 된 미이라였고 음산한 분위기의 어떤 남자는 그 미이라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요시오카(토요카와 에츠시)다. 천년 된 여자 미이라에 온 신경을 빼앗긴 레이코. 그런데 섬뜩하게 무표정한 편집장은 가끔씩 로프트에 들러 레이코의 집필을 재촉하며 신경을 건드린다. 결국 레이코는 이사 온 날 로프트에서 발견한 한 원고뭉치를 자신의 새로운 연애소설로 둔갑시켜 편집장에게 건넨다. 이때부터 레이코는 검은 옷 입은 여자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진흙을 토해내는 레이코,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진흙을 먹고 죽어서 천년 후 진흙 속에서 발견된 미이라, 그 미이라를 곁에 두고 까닭 모를 괴로움에 시달리는 요시오카, 수시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검은 옷 입은 여자, 게다가 무표정의 편집장.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등장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돼 있다. 진흙을 토하는 레이코와 진흙을 먹고 죽은 미이라 사이의 묘한 연관성뿐 아니라 레이코와 요시오카는 둘 다 검은 옷 입은 여자의 환영을 보며 요시오카와 편집장, 그리고 검은 옷 입은 여자 이 세 사람은 이전에 모종의 관계가 형성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로프트’에는 크든 작든 등장 인물들 사이에 연결 고리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의 비밀과 진실은 밝혀질 듯 드러날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계속해서 자극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 널려 있는 이 ‘관계’들은 한편의 서사를 매끄럽게 완성시켜줄 단서들이 아니다. 희미하게 연결된 이 ‘관계’들은 다름 아닌 영화 ‘로프트’의 유니크한 공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재료일 뿐이다.
영화 ‘로프트’의 공포를 구성하는 것은 크게 세가지로 판단되는데 하나는 적막, 둘은 미장센, 셋은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다. 영화는 등장 인물(혹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적막한 로프트의 공간음과 인물들(특히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프레임 안 적절한 배치를 이용해서 심리적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발생시킨다.
특히 검은 옷 입은 여자를 화면 속에 다양하게 배치한 솜씨는 그 공포감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검은 옷의 여자는 나무에 가려져 반만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창 밖으로 두 손만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또는 문짝에 가려져 누워 있는 두 다리만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뒤편, 초점이 나가서 잘 보이지 않는 후경 구석에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천년 전에 죽은 미이라와 주인공만이 존재하는 적막한 로프트. 그 지글거리는 공간 소음에 한참 예민해져 있는 관객들은 화면 전경의 주인공뿐 아니라 화면 후경의 희미한 공간까지 신경 써서 살펴야 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로프트 구석구석을 살피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적막과 환영에 대한 공포를 거의 실시간으로 함께 느끼게 된다.
이처럼 색다른 공포의 체험을 제공한 영화 ‘로프트’는 현재 촉망 받는 호러 영화 작가 중 하나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이다. 일본에서 발표한지 4년만에 한국을 찾은 ‘로프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접하고 보니 구로사와 기요시의 최고 걸작이라 알려진 ‘절규’라는 영화와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어지럽게 널린 ‘관계’를 채 정리하지 못한 내러티브가 아쉽기는 하지만 영화 ‘로프트’는 매력적인 공포의 맛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들어내는 색다른 호러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2009년 9월 작성)
제목 : 로프트 (2009,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