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로드'
아마 핵전쟁 비슷한 재앙이 벌어졌나 보다. 대략 10년 후쯤의 미래에 천지가 한바탕 요동을 치더니 세상은 불 타버렸고 잿더미가 하늘을 덮었다. 이 재앙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모든 이들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재앙 후 지구의 모습은 벌써 우리의 막연한 상상 속에 얼추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러한 세상의 모습이 영화 ‘더 로드’에 있다. 어딜 가나 땅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재, 아직도 불타고 있는 산, 썩어가는 나무들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태양빛을 막아버린 두툼한 검은 먹구름에 추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 괴괴한 거리를 속절없이 걷는 남자(비고 모텐슨)와 소년(코디 스밋-맥피)이 있다. 바싹 야위어 유난히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얼굴, 땟구정물이 흐르는 피부. 최대한 두툼하게 이것 저것 껴입은 옷이 넝마가 다 됐고 무언가를 자꾸 덧댄 신발은 너덜너덜하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긴 시간이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다.
남자와 소년이 무작정 남쪽으로 가는 이유는 별 게 없다. 조금이라도 따뜻할까 해서다. 그렇게 걷다 보면 그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을 것이다. 태어나 한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소년이 묻는다. “바다는 무슨 색이에요?”. 남자는 대답한다. “예전에는 파랬었지.”.
아마 길 끝의 바다색은 파란색이 아니라 잿빛쯤 될 것이다. 파란색의 바다를 상상하며 길을 걷지만 두 사람이 걷는 길은 온통 잿빛만 가득하다. 추위와 허기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굳이 가는 그 길의 끝에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희망은 그들이 하는 이 고난에 비하면 그 크기가 너무 미미하다. 아마 유일한 희망은 ‘죽음’인지도 몰랐다.
‘죽음’이라는 희망을 쫓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어둠 속으로 망설임 없이 먼저 사라진 엄마. 엄마를 따라가면 안되냐는 소년의 물음에 남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대답한다. 소년이 이유를 묻자,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이기고 추위와 배고픔의 곤혹을 다 견뎌내고 남자와 소년이 터벅터벅 남쪽의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은 황량하고 쓸쓸하며 고요해 보인다. 세상은 거의 불 타 없어져서 생기를 잃었고 짐승은 자취를 감췄으며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잡아 먹는다.
이렇게 무료해보이는 그들의 여정은 사실 매우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다. 그 대결의 상대는 추위도 허기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 이 엄청난 상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상대는 바로 ‘비인간성’이다.
이 끔찍한 길 위의 여정에서 소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소년이 가장 우려하고 겁내는 것은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가축처럼 사육하여 식용으로 쓰는 사람들, 그들과 같은 부류의 ‘나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것보다 더한 공포다.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를 붙드는 건 대재앙이 있기 전 아내와 함께 했던 따뜻한 추억, 그리고 소년이다. 남자는 그토록 처절하게 비인간성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에게 소년은 아들이기 이전에 신이며, 그가 운반하는 붉은 불꽃이다.
코맥 매카시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소설 ‘로드(The Road)’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대재앙 이후 지구의 황폐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매우 흔한 소재지만 ‘더 로드’는 결코 간단치 않은 갈등을 담고 있다. ‘불꽃’으로, 혹은 ‘파란 바다’로, 아니면 대재앙이 있기 전 남자의 집 정원에 심어져 있던 총천연색의 ‘꽃’들로 은유되는 ‘인간다움’, 그리고 인간을 사육하고 도살하여 이어가는 ‘생물학적 생존’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인가.
이 끔찍한 질문을 실제 우리 자신에게도 해야 할 그날이 오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그러니 남자와 소년이 운반하는 ‘불꽃’은 조바심이 날 정도로 값지다. 홀로 남은 소년은 ‘불꽃’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 최악의 절망 가운데서 가까스로 품어보는 희망. 영화 ‘더 로드’가 그리는 희망은 그래서 더욱 고귀하다.
(2010년 1월 작성)
제목 : 더 로드 (The Road, 2010, 미국)
OTT : 티빙, 웨이브,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