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공명을 낳고 공명은 성령을 낳는다

영화 '위대한 침묵'

by 무덤덤

너무 어두워서 흐릿해진 형체를 겨우 알아볼 만한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그 형체는 다름 아닌 기도하는 수도사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카메라는 그 기도하는 수도사를 떠나지 않는다. 미동도 않는 피사체를 계속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는 들리지 않던, 수도원을 둘러싼 공간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 ‘위대한 침묵’은 시작됐다.


16년의 깊은 고민 끝에 수도원측의 촬영 허가가 떨어지고, 알프스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이 비로소 카메라에 담겼다. 무려 168분 동안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내레이션 한 번 없이 수도원을 설명하는 단 한 줄의 자막 없이 적막 속에 이어진다. 성서의 글귀가 적힌 몇 컷의 화면과 수도사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짧은 영상으로 적막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침묵으로 3시간 여의 러닝타임을 채웠다.


관객으로서 세시간 여의 적막에 동참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일이다. 관객들은 영화 티켓 값으로 세시간 동안의 수면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두 시간 남짓의 판타지와 재미를 사기 때문이다. 침묵의 일상을 세시간의 침묵으로 그려낸 영화 ‘위대한 침묵’을 무사히 끝까지 감상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분명 ‘위대한 침묵’은 관객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주지 않는다. 불 꺼진 극장에서 세 시간 남짓의 적막을 견디는 게 녹록하지도 않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침묵을 견디고 적응하다 보면 매우 색다른 체험에 이르게 된다.


수 십여 분 후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침묵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면 수도원 안팎의 모든 세세한 소리에 점점 귀가 예민해진다. 수도사들의 잰 발걸음 소리, 긴 옷자락이 서로 스치는 소리, 성서의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들을 온전히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창을 통해 수도원 안으로 들어온 햇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햇살 속에서 빛에 반사된 먼지들이 부단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조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세세한 소리들은 침묵 덕분에 더욱 도드라지는 공명(空鳴)이다. 커다란 카르투지오 수도원을 둘러싼 침묵은 청명한 공명을 낳는다. 그 공명에는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는 절대 들어볼 수 없는 거룩함이 있다.


영화 도중 성서의 글귀를 통해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종교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선뜻 와 닿지 않는 단어라 검색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여기 저기 뒤져보니 ‘대기’, ‘호흡’, ‘생명의 기운’ 같은 말들이 발견된다. 그 고결하고 청명한 ‘대기’나 ‘호흡’, 그리고 ‘생명의 기운’을 통해서 성령(聖靈, Holy Spirit)이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거다.


그러한 의미들을 종합해보고 영화 속 침묵을 끝까지 함께 해보니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일체의 관광객이나 미디어를 통제해서라도 지키고 싶어했던 침묵의 성스러움이 마침내 이해된다. 엄격하게 지켜낸 침묵으로 공명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더 확장하고자 했을 것이다. 수도원의 침묵이 만들어내는 공명은 성령이 인간 안으로 강림하는 통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눈이 먼 늙은 수도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가 눈이 먼 것은 내 영혼을 이롭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넉넉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노(老)수사의 얼굴을 보니 공명은 수도원을 둘러싼 공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의 마음 속에도 있음을 느낀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팎을 침묵으로 비워내고 있었고 그 마음은 욕심과 미련을 덜어냄으로써 비워내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들의 외부뿐 아니라 내부까지도 공명의 깊이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점점 신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침묵은 공명을 낳고 공명을 통해 성령이 인도되는 모습, 그 광경이 펼쳐지는 극장 안 역시 점점 공명으로 깊어지는 느낌이다. (2009년 12월 작성)


제목 : 위대한 침묵 (Into Great Silence, 2009, 프랑스/스위스/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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