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행복합니다'
만수는 지금 아주 행복하다. 부자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백억 정도, 남에게 선뜻 내줄 수 있을 정도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만수는 그의 엉망진창 사인 한번으로 양껏 돈을 만든다. 그래서 만수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 그래도 그는 지금 아주 행복하다.
정신병원의 간호사 수경은 지금 매우 불행하다. 암에 걸린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만성피로와 빚 독촉에 시달린다. 한때 사랑했던 같은 병원 의사는 현재 다른 간호사와 열애 중이며, 가끔 만나는 수경을 벌레 보듯 한다. 터진 입술, 얼굴을 다 뒤덮은 다크서클로 몰골마저 초라해진 수경은 지금 아주 불행하다.
만수가 병원 메모지를 한 장 쭉 찢어 일천 만원이라 쓰고 휘갈겨 사인하더니 수경에게 건넨다. 아버지 병원비에 보태라며. 더 필요하면 얘기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수경은 그 꼬깃꼬깃한 메모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입가에 엷은 웃음기가 살짝 지나치는 듯도 하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두 남녀의 수줍은 연애를 담은 행복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두 사람에게는 연애 따위를 할 정도의 정서적 여유가 도무지 없다. 끝까지 지켜보기가 힘에 겨울 정도로 두 주인공의 불행한 삶만이 영화에 그득할 뿐이다.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의 죽음이 코 앞에 와 있는 수경 옆에서, 지금은 만수가 히죽 웃고 있지만 3개월 전만 해도 만수 역시 지옥 같은 삶 한 가운데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도박에 미쳐버린 형은 돈을 내놓으라며 만수의 목을 졸랐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불시에 오가며 보여지는 만수와 수경의 삶은 제목과는 정반대로 불행의 서사시를 쓴다. 러닝타임을 꽉 채우며 꼼꼼하고 꾸밈 없이 묘사된 두 주인공의 불행한 삶에는 도통 희망의 여지란 게 없다. 이 물 샐 틈 없이 이어지는 불행의 포화 속에서 인물들은 숨 한번 온전히 들이마시고 내쉬기조차 버겁다. 그들은 그대로 이 쏟아지는 포화를 온 몸으로 맞고 자취 없이 사라져야 할까.
허나 인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생의 의지(의지보다 그것은 관성에 가깝다)는 생각보다 지구력이 강하다. 만수와 수경은 온전한 정신으로 불행 속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미쳐서라도 불행의 포화를 살짝 비켜가는 것을 택한다.
이들이 미친다는 것은 그들의 인생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불행한 것들 투성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기어코 행복함의 단서를 찾아내거나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만수는 ‘과대망상증’으로 자신을 감싸고 잠깐 현실에서 비켜나 쉰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만수가 진짜로 과대망상증에 걸린 게 아니라 과대망상인 척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만수는 메모지를 돈이라고 우기면서 행복하다고 억지를 부리고 그 메모지 때문에 겨우 웃는다.
수경 역시 만수가 건넨 메모지 하나에 아주 잠깐이나마 경직된 표정을 부드럽게 한다. 그녀가 겪는 불행에 비하면 그 메모지가 주는 그 잠깐의 편안함이란 티끌만도 못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것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말도 못하게 힘겨운 삶을 버티기 위해서는 그간의 불행을 압도할 만한 크기의 행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불행에 비교도 안될 만큼 미미한 행복만으로도 충분하진 않지만 근근이 그 삶은 이어진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불행한 인간이 부리는 행복에의 억지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놀랍고 또 위대하다. (2009년 11월 작성)
제목 : 나는 행복합니다 (2009년, 대한민국)
OTT :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