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30대 중반의 특별할 것 없는 한 직장인은 한때 매트릭스의 세계관에 심취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젊었을 한 때 이야기. 이제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일상에 치이다 보니 블록버스터 영화의 세계관이라는 게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중동의 폭탄 테러 사건을 보는 것만큼이나 도대체가 감흥이 없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직장인은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저(이하 ‘캡틴 아메리카2’)’를 조조로 보았으니 그날은 이 직장인이 마블 유니버스에 마침내 입성한 역사적인 첫날이 되었다.
글의 시작이 조금 거창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만화를 보면 멀미를 했던 나는 총천연색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마블의 히어로물을 가급적 멀리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결국 마블의 세계와 조우하였으니 영화 '캡틴 아메리카 2'의 그 전도 실력이 지하철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설파하는 종교인 못지 않다. 그만큼 마블은 영악했고 나는 넘어갔다. 거창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등장한 캡틴 아메리카는 마블(당시 명칭은 ‘타이믈리 코믹스’)에서 배출한 거의 최초의 히트 히어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이 성조기를 컨셉으로 한 수트를 입고 방패를 들고 뛰어다니는 캡틴 아메라카에 열광한 가장 큰 이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종전 후 이 성조기 수트의 히어로는 점점 잊혀졌다. 대중의 관심은 미스터리나 로맨스에 향해 있었고 세상은 더 이상 히어로의 존재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요를 상실한 캡틴 아메리카는 그렇게 쓸쓸히 사라지는 듯 했으나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 중반에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나타나거나 사라지고, 또 지지를 받기도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히어로는 그 입지가 변화무쌍했다. 그것은 코믹스 장르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할리우드의 수많은 히어로들이 등퇴장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냉전의 종식, 뉴욕 911 테러 등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히어로들은 꽤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배트맨은 히어로이기 앞서 인간으로서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스파이더맨은 월세까지 밀려 생활고를 겪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화려한 삶과 대의를 위한 싸움 사이에서 제법 심각하게 고민했던 아이언맨까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재, 히어로들은 도대체 어느 편에 서야 하겠는가. 영화 ‘캡틴 아메리카 2’에서 마블은 나름대로 이러한 히어로들의 고뇌에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세상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운영되었던 두 집단, 쉴드와 히드라를 내내 대립시킨다. 이 두 집단은 나름의 알고리즘을 갖고 세계를 수호하였(한다고 믿었)지만 불행하게도 캡틴의 눈에 두 집단은 세계 평화에 다 위협적이었다.
1918년 7월 4일(이 날은 미국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스티브 로저스(캡틴 아메리카의 본명)는 얼음 속에 파묻히는 바람에 26살의 외모를 가졌을지언정 실제로는 96살의 노인이다.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성에게도 쉽게 대시하지 못하는 로저스는 꽤나 고지식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갖고 있는 보수적인 할아버지인 셈이다. 그의 눈에, 어마어마한 살상무기를 장착한 쉴드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이 지점에서 마블의 영악함이 발휘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캡틴 아메리카는 통상 선으로 여겨졌던 쉴드 그리고 악으로 여겨졌던 히드라, 두 집단을 다 파괴해버렸다. 기관을 파괴하고 히어로들만 덜렁 남겨놓은 것이다. 아, 영악한 마블이여.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미래의 세계평화는 마블이 지키겠다는 선언이었을까.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에 비하면 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이 무매력의 할아버지 영웅이 ‘캡틴 아메리카 2’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려 실행한 것이다. 드디어 어벤져스의 리더로서의 면모가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다.
선과 악이 모호한 시대에서 어쨌든 히어로들의 일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면 선이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 비교적 명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마블은 이러한 경계 나누기를 우습다는 듯 무시하고 그냥 양쪽 둘 다 파괴해 버렸다. 어차피 선과 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태어나고 또 어디선가 소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선, 악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절대 기관이 사라진 마당에 결국 평화를 지키는 건 히어로들이다.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 2'를 통해 히어로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수십년 전 전쟁 당시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게 현재를 세팅해 놓았다. 이제 히어로가 필요한 무대를 만들었으니 향후 최소 10년 이상은 마블의 전성기가 예고되었다. 마블의 영화들은 지금 줄줄이 대기중이다. (2014년 4월 작성)
영화 -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2014, 미국)
OTT - 디즈니+